파독간호사 선자이모의 첫사랑 K.H 찾기, 은은하게 따뜻한 연말 선물
백수린작가님의 <여름의 빌라>에서 너무 좋았던 기억을 가지고 이번에는 장편인 <눈부신 안부>를 읽었다. 그때 그 단편들을 읽고 느꼈던 짧고 강렬한,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무언가는 없었다. 그 대신 이번에는 은은하게 스며드는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야기는 해미가 대학생 시절 좋아했던 우재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재회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우재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과거 독일에서 지내던 2년간의 기억이 떠오른다.
해미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 언니를 잃었다. 그 사건 이후 언니를 잃은 동생, 자식을 잃은 어머니로 불리게 된 해미의 가족. 상실의 슬픔과 주변의 시선으로 고통받던 그들은 아버지를 제외한 해미, 동생 해나, 엄마가 함께 엄마의 언니, 해미에게는 이모가 지내고 있는 독일로 떠나게 된다.
독일에 간 해미는 엄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사소한 거짓말들을 한다.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다, 친구가 생겼다, 오늘은 어떤 일들이 있었다. 그 괜찮다는 거짓말들을 이모가 알아채고 위로해 준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외롭게 지내던 해미에게 처음으로 진정한 친구가 생겼다. 아르센 뤼팡을 좋아하는 추리소설 광 레나, 그리고 낯을 많이 가리고 조용한 한국어에 서툰 한수. 그들은 모두 이모와 함께 독일에 온 파독간호사의 자녀이다.
한수는 자신의 아픈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주고 싶다며 친구들에게 함께 찾아주기를 부탁한다. 그렇게 시작된 선자이모의 첫사랑 K.H 찾기.
책을 읽으며 K.H를 찾는 과정에서 해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응원하게 된다. 레나와 한수와 있을 때 겪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느낄만한 감정들에는 해미가 평범한 중학생, 고등학생 같이 보이다가도 문득 아픈 상처들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해미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성인이 된 해미의 직업은 기자였다. 현재는 일을 그만둔 상태. 해미가 기자의 일에 염증을 느끼고 그만두게 된 이유는 일을 하며 자신의 아픈 상처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극적인 기사만 내보내기를 요구하는 회사, 사건의 진실이 아닌 피해자들의 개인사만 보도하는 기자. 너무도 현실적이라 씁쓸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던 이모들은 독일로 넘어간 파독간호사이다. 독일에 정착했지만 독일에도 한국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그들을 설명하며 '뿌리가 끊어진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 모습에서 최근에 읽었던 <느티나무 수호대>의 다문화 아이들이 떠올랐다.
짧게나마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독일에서 시내를 걸어가는 해미네 가족을 보며 "곤니치와", "니하오"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물을 때, 엄마는 이런 말을 해준다.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106p)
과거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도 짧게 등장한다. 해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IMF였고, 선자이모의 첫사랑 K.H는 좋은 학교를 들어갔지만 데모를 했고, 선자이모도 독일에서 함께했다. 주변 사람들은 선자이모에 대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의아했다고 말한다. 선자이모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그저 조용하고 순한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290p)
비슷한 이야기로, 해미는 한 대학 선배에 대해 무신경하고 조금 유치한 사람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재에게 그 선배는 착실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더더욱.' (149p)
K.H의 정체를 끝까지 예상하지 못했다. K.H가 누구일지, 과연 찾아낼 수 있는지 추리하며 읽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겠다.
연말에 읽기 좋은 따뜻한 이야기였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해를 따뜻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해미에게 선자이모의 첫사랑 K.H 찾기는 어떤 의미일까?
해미와 우재처럼 같은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서울에선 모든 게 너무 소란하잖아. 빛조차도 시끄러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다른 사람은 나처럼 고통스럽지 않길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도 적어도 나만큼은 고통스러웠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인간이 나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건 내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마주한 내 안의 악의였다.
"외로움만큼 무서운 병은 없어."
"그래,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몸을 조금이라도 쓰면 인생이 살 만해져."
이제껏 걸어온 여정의 종착지가 여기였다니.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