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진의 남편 찾기, 나영규인가 김장우인가?
많은 사람들의 인생책이라던 <모순>, 드디어 읽어봤다. 제목에 걸맞게 다양한 모순적인 상황들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읽혀서 순식간에 읽었다. 내용이 꽤 예전 책이겠거니 싶었는데 1998년이라니... 나와 동년배인 책을 읽는 경험은 새로웠다. 안진진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와서인지 마치 안진진이 내 친구 같다. 안진진.. 안진진..!!
나는 안진진.
안진진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폭력적이게 변하고, 집을 자주 나가서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안진진의 동생은 조직의 보스가 꿈이며 경찰서를 들락날락한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이런 가족들을 책임지고 있다.
나에게는 어머니와 일란성쌍둥이인 이모가 있다. 그들은 외모가 헷갈릴 만큼 닮았지만 그것만 빼면 모든 것이 다르다. 안진진이 사랑하는 이모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이모는 가족에게 충실하지만 심심한 이모부를 만나 부유하지만 지루한 삶을 살고 있다.
스물다섯 살의 안진진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짠 인생계획표대로 움직이며 자신감 넘치지만 안진진보다 계획이 더 중요한 나영규, 들꽃을 보고 눈물짓는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형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김장우.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
<모순>은 양귀자 작가의 1998년 작품으로 스물다섯 살 결혼적령기의 여성 안진진이 결혼상대를 찾는 이야기다.
일란성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는 결혼한 이후 정 반대의 삶을 살게 된다. 남들이 보기에 불행에 가까운 사람은 어머니, 행복에 가까운 사람은 이모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139p) 어머니는 온갖 불행이 닥쳐올 때마다 그 일을 한껏 부풀려 극대화시킨 후, 그것을 에너지로 바꿔내는 사람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을 때는 일본고객 유치를 위해 일본어 교재를 찾아 읽고, 아들이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는 법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그러나 이모에게는 해결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극복할만한 불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모에게는 가장 큰 불행이었다.
어머니의 딸 안진진과 이모의 딸 주리의 대화에서 두 삶의 대비가 잘 드러나있다.
'그건 옳지 못한 거야,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162p)
주리에게는 불행이 없다. 환경적으로 보자면 주리는 부유한 집에서 자라 해외로 유학을 갔기에 안진진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주리는 작은 우물 안에 갇혀있기도 하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삶을 알지 못한다.
'주리에게는 처음부터 절망 따윈 없었을 수도 있었다. (중략) 세상이 그 애를 단련시킬 수도 있었겠으나 이모와 이모부의 성실한 방어로 그런 기회들은 철저히 원천봉쇄되었다.' (209p)
안진진은 이런 주리의 삶을 보며 아버지가 자신에게 풍요로운 삶을 선물해 주었다고 말한다.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헤쳐나간 것은 결국 어머니임에도 어머니는 거세고 억척스럽다고 생각하며 부끄러워하고, 오히려 불행을 안겨준 장본인인 아버지를 더 사랑하고 연민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시 하나의 모순일까.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213p)
안진진은 이모를 사랑했다. 그러나 이모와 달랐다. 자신에게 없는,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없는 낭만성을 가졌기에 이모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랑을 할 때 꼭 나와 다른 점에 이끌려 사랑을 시작하고, 그 다른 점이 결국 이해되지 않아서 이별하는 경우가 많다.
모순이라면 이 또한 모순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남편을 고르는 과정에서도 나영규와 김장우가 대비된다. 나영규는 현실, 김장우는 몽상이라 표현된다.
나영규는 모든 데이트 계획을 짜두고 그것을 실행하는 스스로에게 만족해한다. MBTI로 따지자면 확실한 J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짤 때 안진진의 의사를 묻지는 않는다.
반면 김장우는 '안진진, 괜찮아?'를 연발하는 섬세한 사람이다. 사진을 찍으러 훌쩍 자연으로 떠나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형을 위해 번 돈을 모두 쓰며 형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안진진은 나영규 앞에서는 솔직하다. 자신의 부끄러운 가족사를 다 털어놓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김장우 앞에서는 솔직하지 못하다. 더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포장한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199p) 안진진이 느끼기에 김장우는 사랑이었다. 특별해서 위험한 사랑. 안진진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273p)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는 모순적이고 감정적이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에게 로봇 같다, 피도 눈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듯 감정이 있는 이상 모순은 당연하게 따라온다. 결국 인생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의 결말을 두고 반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겐 자연스러웠다. 모순이 그렇듯이.
인생이 담긴 소설을 읽고 싶다면, 몰입되고 잘 읽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아름다운 문장들이 담긴 소설을 읽고 싶다면 추천한다.
출간된 지 27년, 아직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영규 VS 김장우
당신은 어머니 같은 사람인가, 이모 같은 사람인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모순은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중략)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너무 특별한 사랑은 위험한 법이었다. (중략) 사랑조차도 넘쳐 버리면 차라리 모자라는 것보다 못한 일인 것을.
진진아.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늦게도 내게 오지 마.
내 마지막 모습이 흉하거든 네가 수정해 줘.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 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