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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cool Apr 05. 2024

천하무적 버즈미

청춘의 사치

촤랑~타르르 탈 탈탈     

시동을 켜고 몸이 반쯤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차에 오른다. 차만 타면 걱정이 없었다. 그 당시 대학생이었던 신분에 운전할 차가 있다는 것은 어깨가 좀 올라갈 일이었다.      

좀은 아니고 많이.     

운전에는 소질이 없던 아빠로 인해 어느 시기부터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고 스무 살이 넘어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던 언니가 흰색 산타페를 구입했었다.      

차주는 언니였지만 실사용자는 주로 동생과 나였다. 기름값이 부담이었던 학생들이라 주유 등에 불 켜진 상태까지 차를 몰고 다녔다. 아슬아슬하게 차가 아사 직전까지 되어야 고작 1-2만 원 번갈아 가며 주유를 했다.

어느 날 동생은 그렇게 주유 등에 불이 켜지고 한참을 운전하고 다니다가 결국 다리 위에서 멈춰버린 적도 있었다.     

그 시절 동생과 나의 주된 대화는 차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오늘 차 써?”      

“응”     

“휴…. 나도 오늘 차 쓰려고 했는데, 몇 시에 올 거야?”     

“늦게 올 것 같은데”     

“내일은 내가 쓴다”     

“알겠어”

          

신분 상승한 사람처럼 차가 있었기에 누렸던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는 뚜벅이였으면 감히 상상하지 못할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데 걷거나 더러워질 염려가 없어 10센티 화려한 구두를 신고 외출을 할 수도 있었으며 새벽에 갑작스럽게 분위기에 휩쓸려 친구와 동해로 떠날 수 있었다.      

남자친구와 오솔길을 드라이브하다가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 있던 버너와 냄비를 꺼내와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있다.     

자동차 동호회에 가입해서 처음으로 떼 지어 운전을 해봤던 경험, 멋지게 차려입고 호텔 클럽 입구에서 발레 직원에게 차 열쇠를 건네던 짜릿한 느낌 등 지금도 생각하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집에서 벗어나 차에만 타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집보다 차 안에 있을 때가 100배는 편안했다. 주말마다 차에만 타면 신나는 음악과 함께 새롭고 흥미로운 곳으로 떠날 생각에 들떠있었다.     

퇴사하고 백수이던 시절, 남자친구도 취준생이었다.      


남자친구의 집은 한강과 아주 가까웠다. 그래서 자주 한강 데이트를 즐겼다. 둘 다 1000원 한 장 없는 거지였다. 데이트할 돈이 없어 남자친구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뚝배기에 계란찜을 하고 밥과 반찬 등을 쟁반에 담아 트렁크에 실었다. 한강 잔디밭에 앉아 남자친구와 뜨거운 뚝배기에 담긴 계란찜에 숟가락을 넣어 한술 떠먹었다. 그 기분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 그 이후로도 나는 묘하게 야외에서 먹는 기분을 사랑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캠핑을 가도 곤드레 솥밥에 양념간장을 만들어 비벼 먹기, 밖에서 피자 만들어 먹기, 야외에서 오징어 튀김을 해서 즉석에서 먹는 등의 것들이다. 집에서 먹을 법한 혹은 만들 것 같은 것을 밖에서 해 먹는 재미를 사랑한다.  

돈은 없었지만, 낭만은 있었고 흰색 산타페가 옆에서 든든하게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차에 탄 나의 모습은 항상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창문을 열고 ‘저 좀 보세요’라는 듯이 둠칫둠칫 음악에 취해 운전하는 것을 즐겼다. 차 안에서는 남의 시선을 받아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차는 바깥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보디가드였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주었고 답답하고 삭막한 집을 탈출하게 해주는 알라딘의 양탄자였다. 남자를 만날 때도 유용했다. 차로 상대의 집에 내가 데려다주면 되었고 상대방도 차가 있는 경우는 운전해서 각자의 집으로 가면 되었다. 누군가 우리 집을 바래다주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한동안은 내가 역마살이 꼈다고 착각할 정도로 틈만 나면 나갔던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집에도 편안하게 잘 있는 것 보면 역마살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슬슬 차를 탄 지 수년이 흐르고 차주와 2인의 운전자가 공용으로 쓰다 보니 하나둘 어려움이 닥쳤다. 운전자는 3명이었지만 차의 관리인은 0명이었다. 책임이 뚜렷하게 있지 않으니 차를 혹사하기만 할 뿐이었다.     

차의 표면이 군데군데 버짐처럼 피어나서 별명을 지어주었다. 나는 그 차를 버즈미라고 이름 붙였다.     

버즈미가 골골거리며 아픈 곳이 많아지면서 걱정도 많아졌지만 취직해서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오일도 갈아주고 도색도 해주었다. 버즈미의 외모는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달리다가 한 번씩 브레이크 걸리듯 움찔하거나 공회전할 때 심하게 덜덜거렸다. 마치 겉만 멀쩡하고 속은 곪아 건강하지 못했던 나의 삶과 닮아있었다. 그래서 더 애정이 갔을까? 버즈미는 삶의 활력소이자 든든한 가족이었다. 차 없이는 초라하고 약했던 나지만 차만 있으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자신감이 차올랐다.     

버즈미는 덜덜거리며 폐차될 때까지 열심히 달려주었다. 가난에 괴로워하며 인간관계가 위태롭던 시절 나를 위로해 주던 동반자였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버즈미는 내 생활에 있어서 과분하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보험료, 유지비, 수리비, 수시로 들어가는 기름값 등 가뜩이나 아등바등 사는 우리 가족의 삶에 이동의 편리함을 위해 차를 쓴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버즈미는 편리한 교통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버즈미는 내 자존감을 지켜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한정적이던 내 삶의 반경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 주었다. 내 인생에서 그런 호사스러운 순간이 없었다면 너무 절망적이었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추억하는 순간은 버즈미와 함께 했던 날이 많다.     

‘분수에 맞게 사는 삶’은 누구나 말하는 정답이다. 하지만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로만 살기에는 그 처지가 절망적이다. 그러면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만 살라고 하는 것 같아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이다.      

‘내 형편에 이건 아니지’라고 나를 가뒀다면 아마 내 젊은 청춘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행복을 느껴도 되나?’ 싶을 정도의 벅차오름을 느껴보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그 경험이 나를 풍요롭게 해 주었고 바닥에 있던 자존감을 살릴 수 있었다. 나에게 사치를 부리고 나르시시즘에 잠시 빠져보는 것, 그런 행복감도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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