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기
“500에서 238을 빼면 얼마지?”
누군가의 훅 들어온 질문에 동공이 흔들린다.
질문이 들어오면 긴장하면서 뇌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
덧셈, 뺄셈 계산을 순발력 있게 처리하지 못한다. 단순 암산도 못 하는 나는 멍청하다고 늘 생각해 왔다.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들킬까 봐 더 긴장하고 경직된다.
수, 우, 미, 양, 가, 이 중에서 수를 유일하게 받아 본 과목은 미술이다. 양과 가가 많았던 양가 규수의 학교 성적표.
내 성적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연탄을 때고 살아서 일산화탄소 냄새와 밤늦게까지 다투시던 부모님 때문이라고 확신했었다. 내가 누워있던 공간과 연탄 화덕의 직선거리는 불과 50센티가 될까 말까 했다. 가스 냄새가 아침마다 내 머리를 무겁고 멍하게 만들었다.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우유 한잔이나 아침밥을 먹기 힘들어 머릿속도 비고 뱃속도 빈 채로 좀비처럼 학교에 갔다. 부모의 손길이 닿아 바짝 당겨 묶은 포니테일 머리를 하고 부지런히 준비하고 온 친구들과는 대조적으로 흐트러진 차림새와 표정을 나는 갖고 있었다. 혼자 두 손을 뒤로하고 댕강 묶어 풀어질 듯 말 듯 한 머리와 부실한 가방 속 준비물은 학교에서도 여실히 성적으로 드러났다. 그렇게 멍하게 책상 앞에 앉아 귀에 들리지도 않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겨우 듣고는 집으로 왔다.
부모님은 동네에서 식당을 하셨다. 아침에 나가셨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오셨다. 피곤해도 싸울 체력은 남아 있으셨는지 매일 밤, 참 많이도 싸우셨다.
“이런 똥 멍청이 같으니” 아빠는 똥 멍청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정말 그랬다. 그 말은 엄마에게 향했지만, 나에게도 몇 번은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확실히 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똥 멍청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싸우느라 바빠서 우리 삼 남매의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지를 봐도 모르는 게 많았다. 속 시원하게 궁금한 것을 알려주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고 나도 굳이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도 반에서 꼴등은 겨우 면하고 있었다. 과목별로 우등반 열등반을 나누기도 했는데, 매번 열등반으로 이동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과외라는 것을 받아보았다. 예쁘고 똑똑한 대학생 언니였다. 올 때마다 매번 초코칩 쿠키를 사 왔다. 친절하고 나긋나긋 부드러운 목소리의 언니도 좋았고 모르는 것을 쉽게 알려주니 공부에 재미를 조금 알게 되었다.
고3이 되었고 미대 진학을 꿈꿨지만, 수능 400점 만점에 232점을 맞았다. 당연히 그 점수로는 서울 내에 어느 대학도 붙을 수 없었다. 막대사탕 한번 혀로 맛보고 감질나게 뺏긴 찝찝한 기분이었다. 더 먹고 싶었다.
어떤 맛인지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 이제 막 초코칩쿠키 언니를 만나 뭔가 배우는 기쁨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포기하기엔 매우 아쉬웠다.
‘우리 집은 재수라는 건 있을 수 없어. 대학 떨어지면 기술부터 배워’라고 아빠는 언니가 수능시험을 치르고 난 다음 날 말씀하셨다. 그동안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라 재수한다고 크게 성적이 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한 명이라도 생활 전선으로 나가 돈벌이를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언니는 부모의 뜻대로 미용 기술을 배워서 일을 시작했다.
“저는 재수할래요” 아빠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볼멘소리로 툭 내뱉고는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빠에게 얘기할 땐 늘 그랬다. 무섭고 어려워 불편하지만 할 말은 했다. 울먹울먹 한 볼멘소리가 아빠와 대화할 때 하는 내 특유의 화법이었다. “그만 좀 울어! 눈구멍이 썩었냐?” 내가 울자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게 나와버리는 눈물도 아빠는 강제로 댐을 쳐서 막아버리곤 하셨다. 억지로 참아내느라 제멋대로 들썩거리는 어깨와 코에서 나는 ‘끄윽끄윽’ 소리만은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약하지만 엄마라는 방패가 있어 그나마 할 말은 하고 숨어버릴 수는 있었다. 자식들에게 티는 안 내셨지만, 엄마가 아빠의 잔소리와 악담들을 다 막아내느라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렇게 통보하듯 내 말만 전하고는 무작정 재수학원을 알아보았고 공부하겠다는 자식을 결국 말릴 수 없어서인지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학원비를 내어주셨다. 미술을 했기 때문에 미술학원과 재수학원 둘 다 다녀야 했는데 그 당시 학원비가 만만치 않게 들었다. 방학 때는 미술학원으로 몇백만 원의 특강비를 추가로 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쭉 10년간 미술을 배웠다. 담임선생님의 칭찬을 계기로 좋아서 시작했고 미대 진학을 목표로 다녔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하다 보니 미술인이 되는 길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처음 재수학원에 갔을 때 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 남은 자리는 안경을 낀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긴 남학생 옆자리였다. 알고 보니 삼수생 반장 오빠였고 오른쪽은 우리 반에서 반장 오빠 다음으로 공부를 잘하는 나보다 1살 많은 예쁜 언니였다. 하얗고 예쁜 얼굴에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인기가 많았다.
앞줄에 앉았던 것도 처음이었지만 면학 분위기라는 것을 처음 경험해 보았다. 반장 오빠는 쉬는 시간에도 앉아서 공부를 했고 수업이 다 끝나고 학원에 남아서 자율학습을 했다. 우등생 틈에 끼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서로 돌아가면서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도 의논해서 풀어가며 공부로 친목을 다졌다. 모르는 게 있으면 학교 교무실 같은 강사실로 가서 선생님께 물어보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께 질문하는 일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하는 특별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걸 내가 하고 있다니
달이 바뀔수록 내가 공부 잘하는 그룹에 끼어있다는 것이 좋았고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반에서 2등까지도 찍어보니 공부에 자신감도 붙었다.
재수를 해서 100점 이상 점수를 올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작년까지만 해도 수도권에 있는 대학은 꿈도 못 꾸었고 2년제 대학도 못 갈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언어영역을 1개만 틀렸다. 원래 국어를 참 좋아했다.
언어영역이 전국 상위 0.1% 안에 들어 특차에 지원할 수 있었다.
특차 결과는 좋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술 실기력이 부족해 특차에서 떨어진 것 같다. 내 그림의 특징은 디테일은 좋은데 전체적으로 큰 덩어리를 볼 줄 아는 능력이 부족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실기시험을 보라고 하면 연습은 하지 않았어도 그때보다 실기시험은 더 잘 볼 수 있을 자신이 있다. 그림 그리는 스타일이 성격에도 반영된다. 나는 전체적인 파악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우선순위와 급한 일, 중요한 일, 대충 해도 되는 일 등을 나눠 처리하는데 미흡한 면이 있었다. 아무튼 나는 1년 만에 in 서울 4년제 여대에 입학했다.
우리 집안은 대체로 장사 집안이었다. 큰고모는 건재상을 하시다가 갈빗집을 하셨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셨다. 둘째 고모네는 부부가 삼겹살집을 하셨다. 둘째 고모는 본인 자식만 최고라고 여겼다. 셋째 고모는 우리 부모님의 장사를 도왔고 고모부는 이삿짐센터를 하셨다. 아이가 없어 조카들을 예뻐하셨다. 막내 고모네는 슈퍼마켓을 했다.
외가 쪽 삼촌들과 외숙모들은 서울로 상경해 대체로 재봉틀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을 다닌 사람은 없었다.
외가 쪽 친가 쪽을 통틀어 내가 집안의 첫 대학생이었다. 재수를 반대하셨던 아빠는 내가 대학에 합격하고 나니 내심 뿌듯해하셨다.
초중고 때와 달리 대학교 생활은 세계관을 넓히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마다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처럼 신나게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비슷한 나잇대의 여자들이 모여있어 비교하기도 딱 좋았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우리 집안과는 결이 다른 종족을 보게 되니 위축되는 마음이 한 자리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선생님이거나 대학 교수인 집, 전문직을 갖고 계신 아버지, 사업을 크게 하는 집, 직업이 어떠하건 간에 적어도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들.. 우리 집과 비교할 대상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나는 허울 좋은 서울 강남에 살면서 지지리도 가난한데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부모가 보증금까지 해줄 정도의 능력 있는 집안이 많았다.
나는 늘 부족하고 멍청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잠식되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똑똑하다는 것’의 의미는 머리 회전이 빨라 암기와 암산을 잘하고 남들 앞에 나서서 야무지게 발표도 잘하는 반장 스타일의 우등생을 말한다. 그동안 내 주변에 있던 우등생들은 신기하게도 집안도 부유했다. (대체로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이 그만큼 심하게 가난했으니까) 내가 만든 국어사전에서 똑똑하다는 의미에는‘부유하다’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렇게 자책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환경 탓만 하느라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길진 않지만 20-30대의 폭풍 같은 시간을 거쳐 보니 세상은 똑똑한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머리가 좋다고 해서 잘 사는 것 또한 아니었다.
회사에는 머리 좋은 사람, 배려있고 친절한 사람, 유머 있고 분위기를 잘 주도하는 사람, 협력을 잘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골고루 모여야만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니 부자여도 죽을 만큼 괴로운 사연이 있는 사람도 있고 가진 게 없어도 뒤늦게 성공한 사람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각자 자기만의 장점들이 있다. 지혜롭게 사는 것도 똑똑하게 사는 방법 중 하나이고 느려도 자신만의 속도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똥 멍청이가 아니다. 비록 계산기처럼 빠르게 수학 계산은 못 할지라도 천천히 내 스타일대로 심사숙고하며 내 기준의 옳은 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미술에 재능 있어서 선생님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부모님을 졸라서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한 번도 그만두고 싶었던 적 없이 10년 동안 미술을 했다. 불굴의 의지로 재수를 한다고, 더 공부해 보겠다고 열정을 가졌던 나를 칭찬한다. 1년 만에 성실하게 재수학원을 다니며 올린 엄청난 성적과 노력의 결실들이 내가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더 나은 내가 되려고 했던 나를 처음으로 인정해 본다.
항상 나은 것, 좋은 것들을 경험하고 보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을 탐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막연하게 꿈꿔왔다. 좋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라는 꿈, 많이 배우는 꿈, 멋진 사람이 되는 꿈. 그런 꿈을 이루려고 나도 못 느끼는 사이 나는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고 지금도 계산은 느리지만 나의 속도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