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첫사랑
짧은 커트머리를 한 오사카님은 앞머리와 함께 정수리 위로 사과머리를 귀엽게 묶고 나타나셨다.
요즘 화려한 빨간색 장미 무늬가 들어간 스카잔 점퍼를
몇 주째 입고 오신다. 봄이 되니 설레는 마음이 의상에도 반영이 된 듯하다.
오카사님은 비밀이 많기로 소문이 났다. 수업을 함께 듣는 다른 뇌성마비 장애인 수강생들도 하나같이 말한다.
“저.. 언.. 니는 비밀.. 이 많.. 아.. 요.”
지난주에 장애인의 날 행사로 인해 복지관 수업을 한 주 쉬었기 때문에 2주 만에 만나는 것이라 기대를 안고 일찍 복지관에 도착했다.
수업 30분 전인데 초코빵님은 이미 와계셨다.
수업 준비를 하며 흘끗 본 초코빵님의 모습은 긴 시간 기다리는데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책상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자신만의 어떤 방법을 터득했을까?
“일찍 오셨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 지. 난.. 주에 못만났.. 잖. 아.. 요”
“맞아요. 행사는 재미있으셨어요?”
“네.. 축.. 구 경기.. 구경.. 했.. 어.. 요. “
곧이어 아멘님과 실버님 그리고 오사카님이 들어오셨다. 어쩌다 보니 여성 수강생들만 일찍 모이게 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이 갑자기 오사카님이 칵칵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가끔 뜬금없이 웃는 오카사님이기에 이번에도 또 비밀이겠지 하며 기대하지 않고 물어보았다.
“오사카님, 무슨 생각이 나서 웃으신 거예요?”
연신 웃기만 하는 오사카님을 보며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비밀이에요?”
나는 집요하게 파기 시작했다.
“뭔가 좋은 일로 웃으시는 것 같은데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오사카님은 눈알을 잠시 굴리며 누군가를 혹은 어떤 추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뇌성마비 장애인들 중에서도(사실 나도 수업을 하면서 만난 6명의 수강생이 전부지만) 장애의 정도가 각각 다르다.
대부분 말할 때 발음과 억양이 어눌하거나 어색하지만 대화가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몸을 쓰는 정도도 다르다. 보조기구를 이용해 걷는 사람, 휠체어를 탄 사람, 절룩거리며 걸을 수 있는 사람 등등. 인지 능력도 개인별로 다르다. 가벼운 소통만 가능한 사람도 있고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오사카님의 경우, 대화는 불가능하고 손동작으로 간단한 소통 몇 가지만 가능하다. 손을 드는 동작, 부끄러워 두 손으로 입을 가리는 행위, 쉿 비밀이라고 할 때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는 것 들이다. 오사카님의 말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을 때는 글자를 적어 소통한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없을 뿐이지 내가 한 말은 모두 정확하게 알아들으신다.
나는 오카사님에게 드로잉펜을 쥐어주며 우리가 수업할 때 사용하는 드로잉 패드에 적어달라고 요청했다.
오사카님이 손에 힘을 꽉주며 한글자씩 쓰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하지만 꼭꼭 눌러쓴 이름.
정. 연. 수.
그리고 그 아래 한 글자 더.
첫. 사. 랑
맞은편에 앉아있는 수강생들에게도 실시간으로 읽어주었다. 까르르 봄 햇살과 함께 교실분위기는 순식간에 설렘이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다.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같은 눈빛을 하며 한번 더 까르르 웃었다.
과거에 복지관에서 체육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이라고 했다. 지금은 나오지 않으신다고 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오사카님 스트레칭 도와주시면서 팔도 잡아주시고 다리도 쭉쭉 펴주시면서 사랑이 싹트셨구먼요.”
오사카님은 숨이 넘어갈 듯 입을 크게 벌리며 웃으셨다. 잠깐 오사카님의 첫사랑 여행을 다녀오니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느리지만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들어주면서 기다림의 위대함 같은 것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기다림에 대해서는 선수다.
펜을 드는 동작 브러시나 칼라를 선택하기 위해 한 곳을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터치해야 할 때도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만두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소리를 내어 손을 들고 도움을 받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동안 그들은 재미있는 상상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바람이 살랑이는 날 첫사랑을 생각하고 한 주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 보고 또, 내가 감히 추측도 못 할 신비스러운 이야기도 있을 것만 같다.
기다림과 상상은 봄에 어울리는 말이다. 봄 햇살과 따뜻한 봄바람이 비밀이 많은 오사카님의 마음을 두드려서 열려주었듯. 조금 긴장되어 있던 마음도 말랑하게 해준다.
오늘 오사카님의 첫사랑 이야기처럼 우리는 행복한 꽃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