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uloir, c’est pouvoir
며칠 전 수능시험이 끝났다. 우선 12년의 교육 과정을 견디며, 혹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다시 시험장에 들어서며 힘겨운 고개 하나를 또 넘은 모든 분들께 박수를!
수능 한파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번 수능은 꽤나 꿉꿉하고 무거운 날씨였다. 내가 수능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에는 롱패딩으로 온몸을 무장하고 눈을 맞으며 갔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다. 올해는 눈이 아니라 비가 내렸다. 덕분에 자칭 ‘수용성 인간‘인 나는 하루종일 침대에 들러붙어 불쾌함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수험생 분들의 긴장과 불쾌감을 내가 대신 받아낸 것으로 치고 생각하면 하루쯤은 견딜만한 정도였다. 이 하루를 위해 살아온 사람도 분명 있을 텐데, 이쯤이야!
고3 현역 당시, 나는 수시 전형으로 이미 대학에 합격했기에 수능에 큰 미련이 없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그냥 시험장에 가지 않은 아이들도 많았다. 다만 인생에서 가장 큰 이벤트라고 할 만한 이 시험을 어떻게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언젠가 돌이켜 볼 추억 하나를 만드는 셈(그리고 정시 전형의 수험생들의 발판이 되어주는 셈), 나는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시험장에 갔던 것 같다.
내 수능 기간, 아랫 지방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 피해가 상당한 수준의 지진이라 뉴스나 인터넷 신문에서 한창 떠들썩해질 정도였다. 시험 전날밤, 나는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며 무난히 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때, 띠링.
“수능 연기됐대!”
학교 단체 채팅방에 한 줄의 메시지가 왔다. 엥? 만우절도 아니고 이런 거짓말을 한담. 시답지 않게 넘기려는데 갑자기 채팅창이 폭주를 했다. 뭐야, 진짜야? 하며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가운데 거실에 틀어져 있던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때마침 “수능 연기” 소식을 전했다. 얼떨떨하게 별일이 다 있다, 생각하던 차에 정시 전형으로 대학을 준비하던 친구가 펑펑 울며 내게 전화를 했다. 나한테는 수능이 큰 의미도 아니었고 이 사건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나, 서럽게 한탄하던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때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인생을 배팅했다 하여도 과장이 아닐 법한 시험이었겠지. 대학이란, 학업이란, 인생이란 그렇게 결정할 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문득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예정된 날짜에서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수능 시험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80% 이상의 학생들은 웬만하면 전부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갔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긴장감은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만큼 아무렇게나 걸음한 시험장 교문 앞에 깜짝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수능을 보지 않는 친구들 몇몇이 그 추운 아침부터 한 줄로 서서 들어가는 길을 응원해 주러 나와 있었다. 나는 참 운도 좋지. 과분하게 사랑을 주는 내 사람들이 있으니. 2년 동안 내리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님이 늘 마법의 주문처럼 우리에게 주입시키던 문장이 있다.
“Vouloir, c’est pouvoir ! “
“Je suis fière de moi ! “
원한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입김이 하얗게 서리는 새벽 같은 아침, 그 문장들을 외치며 나를 배웅해 주는 목소리들이 수능이 별로 심각하지도 않았던 나에게조차 어찌나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인생의 큰 산을 넘을 채비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꼭 들었으면 좋겠다 싶어 나는 속으로 하염없이 그 문장들을 되뇌었다.
결과적으로 수능 등급은 엉망이었다. 수험생들의 발판이 되어주겠다는 목표는 이룬 셈이다. 국어 영역에서는 정말 재미있게 지문들을 책 읽듯 정독하였고, 수학 영역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계산식을 굳이 증명하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영어는 내 자존심인지라 영어만큼은 제대로 보았고, 탐구 영역도 국어랑 비슷하게 독서나 하고 나왔던 것 같다.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풀 때보다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렇게 시험을 치니, 조금 재수 없다거나 한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말 그대로 수능을 하나의 추억거리로써 한껏 즐겼다.
이 시험이 누구에게나 나처럼 즐길 수준이라면 좋을 텐데. 그랬더라면 부담감이 줄어 오히려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올해 수능날도 누군가가 아침부터 투신하여 부상을 입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매 시즌마다 변함없이 마음이 시리다. 마치 마음에도 한파가 찾아든 것처럼. 그래서 감히 매년 속으로나마 마법 주문과도 같은 문장을 습관처럼 읊게 된다. Vouloir c’est pouvoir. 간절히 바란만큼 모두 있는 힘껏 해낼 수 있길 바라며. 올해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수험생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싶다.
나는 그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