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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Oct 29. 2023

커서 뭐 될래?


  ”커서 뭐가 되고 싶니? “

  라는 질문에 친구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했었다.

  “대통령이요, 과학자요, 선생님이요, 아이돌가수요!” … 등등이 당시 어렸던 내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유망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별났던 걸까,


  “뮤지컬배우요! 그리고 성우, 아 성악도 해보고 싶어요!” 


  뭐, 지금 생각해 보면 별날 것까지야 있겠나 싶다만, 어릴 적 받아본 예체능 교육이라고는 태권도와 합기도, 피아노 체르니 40까지 뚱땅거린 것뿐이었던 내게는 다소 생뚱맞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미술도 잠시 배웠으나 기억에 남은 면적은 찢어진 종이 파편만큼도 되지 않으니 제외한다)

  내가 이런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다 엄마 탓…, 아니 덕분이다. 물론 엄마가 처음 의도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을 테지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대구시 달서구 산새마을,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네 시간 만에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났단다. 그리고… 그 이후 왜인지 4살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그 기억들은 제치고, 나는 5살 즈음이었다.

  당시 엄마는 방문 학습지 교육에 투자를 많이 했다. 그중 영어 교육에는 특히나 열정적이셨다. 내게는 세 살 많은 오빠가 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오빠가 수업을 받고 있을 때 나는 그 옆을 기웃거리면서 더 흥미를 보이던 꼬맹이였다고 한다. 심지어 한 번은 이모네 가족들과 함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는데, 이 꼬맹이가 영어로 나오는 해설을 듣고 냅다 따라하더란다(올바른 영어였는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생각했을 터였다. “내 딸은 영어 천재인가 보다!” 그때부터 엄마는 내게 동시통역가가 되라고 하셨다. 동시통역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줄도 모른 채, 재미있는 일인가 보구나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영어는 정말 재미있는 놀이였기 때문이다.


  엄마의 교육 방식은 이러했다; 내가 방을 이동하는 곳마다 영어 테이프를 틀어놓기, 하얀 종이를 길게 잘라 코팅한 뒤 디즈니 만화 영화 비디오를 틀어 주고 그 코팅 종이로 자막 가려놓기, 애초에 영어로 자막이 나오는 영어 비디오 틀어주기, 영어로 된 뮤지컬 동화 이야기 CD 틀어주기, 영어로 된… 영어로 된…… etc.


  나는 언어 능력이 특화된 아이였던지라 엄마의 의도대로 곧잘 영어를 잘 습득하였다. 하지만 능력과 흥미는 별개의 일. 오히려 그 생소한 언어의 목소리가 풀어주는 노래와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처음엔 가수가 되겠다고 하였다. 언어 배우기의 첫 단계로 접했던 것은 늘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엔 연기자였다. 꼬맹이 시절의 나는 워낙 매사 열정적이기도 했고 관심을 갈구하기도 했던 터라,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구연동화 연극이라도 하면 유독 선생님들의 칭찬을 들었다. 한 번은 수줍음이 많았던 다른 친구 대신 내가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도 했다. 동시에 나는 춤을 추는 것도 좋아했고 욕심도 많았다(아무래도 관심을 갈구했기에…).

  그런데 세상에나,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직업이 있다지 않은가! 그때부터 내 꿈은 뮤지컬배우가 되었다.


  그 뒤로 나의 장래 희망 직업은 이리저리 많이 바뀌기도 했다. 영국에서 온 보이소프라노의 내한 무대를 보고 난 후에는 성악을 하고 싶었고, 애니메이션에 푹 빠진 뒤에는 성우가 되고 싶었다. 국립 발레단의 공연을 보면서 발레를 배우고 싶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들어서서는 임상심리사나 통번역가 같이 조금 더 “현실적”인 직업군에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연기를 하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물론, 내 생각을 지지하지 않으셨다.

  어린아이의 한때 낭만 가득한 꿈일 뿐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더군다나 당신들이 보시기에 그쪽으로 특출 난 재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경제적 지원도 풍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어떻게라도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도록 길을 잡아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차선으로 선택한 것은 외국어였다. 어릴 적부터 잘한다고 칭찬을 듣고 스스로도 흥미를 가졌던 외국어. 영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인 외국어가 되어버렸고 학교에서 배우는 딱딱한 영어만 하느라 흥미가 떨어져 버렸기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고 싶었다.

  프랑스! “예술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의 말을 배우면 언젠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라는 미련 어린 생각을 가지고 외고의 프랑스어과에 진학했다.

  다행히 프랑스어는 나의 적성과 흥미에 맞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프랑스 언어와 문화 과목에서 언제나 1등 혹은 2등을 차지했으니까. 불분명한 예체능 계열보다는 언어 계열에 확연히 강하고 보장이 되어있다는 사실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의 내 첫 기억이 시작되는 시절부터 이어진 꿈의 미련은 계속해서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발목이 잡힌 채로 무난히 고등학교를 마무리하고, 나는 4년제 대학의 불어불문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검색한 것은 등록금도 아니고 장학 정보도 아니었다. 바로, 동아리. 반드시 연극이나 뮤지컬 동아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꿈을 펼치고 이 미련 맞은 족쇄에서 자유로워지리라!

  그런데 미련이라는 것이 사실 내 발목뿐만 아니라, 온몸에 아주 질척하게 들러붙어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사람 마음이 어디 의도한대로만 이루어지겠는가. 대학의 중앙 뮤지컬 동아리에서 경험한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고 고되었지만, 그 과정과 이를 통해 이루어 낸 것은 몇 배 이상으로 훨씬 더 짜릿했다. 나는 깨닫고 말았다. 어릴 적 돌고 돌아 결국 연기를 하고 노래를 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내가 설령 다른 곳으로 도피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바닥으로 돌아오겠구나. 그렇게 평생 돌고 돌던 “언어 천재” 꼬맹이는 자라서 겁 없이 무대 위 세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이 선택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후회했을 것이다. 나의 미래는 불분명하고, 언제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며, 여전히 목적지에서 이탈하여 어딘가를 빙빙 맴도는 중인지도 모른다. 요즘에 주로 하는 생각도 사실 그런 것이다. “나중에 뭐 하지?”


  아무렴 어떻겠는가. “커서 뭐 될래?”라는 문제는 돌잡이 때부터 시작된 영원의 숙제인 것을.

  따라서 내가 내린 결론은 “뭐라도 되겠지”이다.

  지금 어릴 적의 나로 돌아가 그런 질문을 듣는다면, 난 이렇게 답할 것이다.


  “글쎄요, 뭐라도 되겠지요!”


  아무튼 내가 사는 현재가 후회 없고, 행복하고, 미래의 나에게 미안하지 않으니, 지금까지 큰 나로서는 뭔가가 된 것 같긴 하다. 앞으로 더 커서 뭐가 될지는, 살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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