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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Oct 25. 2023

편지

10년 지기 여름, 그리고 겨울.


  얕은 관계의 많은 친구들과 깊은 관계의 몇몇 친구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듣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후자를 고를 것이다.

  청소년기를 나름 사춘기 없이 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흔한 질풍노도의 시기 고독한 여학생의 치기였던가, 그때의 나는 친구들과 그리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낯을 좀 가리기도 했을뿐더러 지역을 넘나들며 이사를 다녔기에 소꿉친구나 단짝친구라고 할 만한 아이는 없었다. 그런 내가 열다섯, 여중에서 한 친구를 만났다.

  평생을 소중한 나의 일부로 남을 그 아이. 작지만 강하게 반짝이는 그 아이는, 뭐랄까, 보석에 비유하자면 흑진주 같았다. 그 아이로 인해 나는 글이라는 것을 처음 제대로 써보았고, 새로운 것들과 새로운 감정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다른 학교로 갈라지고, 대학교에 가면서는 지역까지 갈라지며, 각자의 인생에 충실하느라 소중함의 그 빛이 조금씩 가려졌다. 연락도 뜸해져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 그 아이에게 소원해졌다.

  그렇게 반복되는 지루하고 치열한 시간을 보내다 어떠한 계기로 올해의 뜨거운 여름, 그 아이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받은 날 밤바람 내음이 달콤했던 기억이 난다. 참 달콤하고 그리운 냄새였다. 바람을 타고 주고받은 올해 여름의 편지에 난 그 아이가 마치 내 곁에 있는 것처럼,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INBOX:

여름이야. 계절 변화에 둔감한 나도 금방 알아차릴 만큼 하늘이 파란 날이었어. 움이 트는 봄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내뿜는 여름에는 특히 네 생각이 나. (누군가 '여름'하고 물으면 '령화'라고 답을 돌려주고 싶은 정도로) 이상하지. 네 생일은 3월인 데다 여름에 따로 챙기는 기념일 같은 것도 없는데. 여름의 산물인 땀에 얼룩지기는커녕 넌 더욱 선명해졌어.


넌 절대 그 이유를 모르겠지. 어쩌면 궁금할 수도 있겠다. 왜 하필 여름일까. 왜 하필 나일까. 왜 하필. 왜. 하필. 왜. 네가 품었을 의문을 마치 주문 외우듯 조용히 중얼거려. 나는 여름을 재정의하고 싶었던 것 같아.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상처 위에 붙이는 밴드처럼. 약의 쓴맛을 감추기 위해 홀랑 입에 집어넣는 알사탕처럼.


사실 난 여름이 싫어.


눈 부신 햇살이 내 약점을 겨냥해 비추는 것 같아서. 구멍 난 그늘에 나를 숨기기엔 역부족해서. 그래서 너를 떠올리나 봐. 내가 가진 것 중 몇 안 되는 소중한 너를. 이 징글징글한 여름 속에 너를 끼워 넣어 녹지 않고 버텨내려고. 오래전 너와 보냈던 여름과 언젠가 너와 보내고 싶은 여름을 멋대로 떠올리면서까지…


뙤약볕 아래 뜨겁게 피어난 장미 담벼락에 너를 세워 사진을 찍어야지 독립 서점에서 고른 시집 한 권을 너의 집에서 나란히 누워 같이 읽어야지 너를 닮은 문장을 발견하면 거침없이 밑줄을 그어야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스포츠 댄스를 너와 함께 춰야지 밀린 박자와 꼬인 스텝으로 엉망이 된 춤을 추다가 바닥에 엎드려 깔깔 소리 내 웃어야지


이런 여름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여름에는 특히 네 생각이 나. 보고 싶어.


추신. 이번 여름도 잘 부탁해.


RE:

여름이구나. 잘 지내? 잘 지냈니?

정말 기대했어. 기대한 만큼 오랜만에 읽은 너의 글은 여전히 한 글자 한 글자 애정이 가득하고 따뜻하네. 그 글자들을 여러 번 곱씹다 문득 일렁이는 향수에 답장을 보내고 싶었어. 뭐라고 운을 띄우는 게 좋을까. 잠시 고민했는데, 이렇게 멋없고 진부한 안부 인사나 괜히 한 번 건네본다. 그리고 이 밑으로 이어질 내용은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며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말들을 더 멋없이 그냥 나열한 글자들의 조합일 테지.


종종 오래전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곤 해. 핸드폰 유리 액정 너머로 당시의 기분, 감정들이 전해지는 것 같아. 정면을 응시하는 나, 그리고 너는 웃고 있어. 그 모습을 담는 너, 그리고 나의 표정은 어땠을까? 너의 편지를 받고 다시 그것들을 보니, 신기하게도 그날들조차 여름이더라.

우리가 보지 못한 지가 얼마나 되었더라. 너는 여전히 내 기억 속 그 모습 그대로일까.


여름이라. 생각지도 못한 표현에 의문이 가득했어. 그래, 네 말대로 왜? 왜 하필 여름일까.

사실 나도 여름을 정말 싫어해. 그런데 말이지, 그런 여름으로서 내가 하나의 의미가 된다면, 나도 여름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밤마다 여름 냄새가 물씬 풍겨. 뜨거운 햇빛이 내리쬔 자리를 정리하듯 불어오는 바람은 아주 부드럽고, 선선하면서도, 반나절 햇빛의 온기가 묻어 따듯한 냄새가 나.

어쩌면 이 여름밤바람은 너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미루고 미루다 잔뜩 쌓여버린 인사들을 이 짧고 멋쩍은 답장에 담아 보내.

소중해 마지않은 네게,

이번 여름도 거기에 있을게. 부디 건강하길.



ps.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나는 너를 겨울에 비추어볼까 해. 보고 싶다. 나의 겨울도, 잘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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