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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아 Nov 06. 2023

8900km 사이


  연애라는 것을 해 본 일이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다. 그런 내게 특별히 긴 시간을 만난 것도 아니었으나 유독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미카라 불렀고, 그는 스페인 혈통의 벨기에 출신 경호 요원이었다. 내 첫 국제연애였다.


  6년 전 여름 무렵이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던 나는 당시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펜팔 어플을 통해 프랑스어권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내 친구들 중에는 그렇게 소통하다가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다니, 그때의 나로서는(당시 내 친구들에게 미안하지만), 조금 께름칙한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내가 그렇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나도 이미 그 어플을 통해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개중 한국에 여행 온 친구 한 명은, 우리 집에서 머물게 하고 내가 직접 가이드를 해 줄 만큼 친밀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인 관계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참 보수적이기도 하지. 그 펜팔 어플은 언어 교환을 위한 목적이었다. 내 모국어와 배우고 싶은 언어를 설정하면, 내 언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그 나라권의 사람들이 보여지고, 원하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요즘 데이팅 어플과 다를 바가 없다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보통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편이었는데, 한 번은 그에게서 여느 사람들과 비슷한 첫 채팅이 걸려왔다.  “Bonjour :)”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와의 대화를 이어가다가 카카오톡으로 넘어와 소통을 계속 주고받았다. 텍스트로 먼저 만난 그는 친절하고 세심하고 배려가 많았다. 그와는 이야기는 끊김이 없이 부드럽게 이어갈 만큼 나와 코드가 꽤 잘 맞는 듯했다.

  어느 날 그가 바캉스 기간을 맞아 한국에 잠시 혼자 여행하러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의 목적지는 서울이었고 나는 청주에 살고 있었는데, 여행 중 나를 보러 내려오겠다고 했다. 내가 살던 지역엔 놀거리나 볼거리라 한정적인 편이라 그리 길지 않은 여행 기간 동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가 온다면 나도 그를 보고 싶었기에 기대를 안고 그를 기다렸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첫인상은 ’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 모습‘, 그리고 ’꽤나 내 타입이다.‘

  어색한 웃음으로 서로를 맞이한 우리는 볼 것도 몇 없는 내 도시를 산책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실제로 만난 그는 더 세심했으며 감성적이었다. 핸드폰 액정 너머 글자로 소통하는 것이 아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목소리를 들으니 느낌이 참 달랐다. 정말 이상하게도 이전에 똑같은 루트로 만난 친구와는 아주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숙소는 서울에 있었기에 밤이 되자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즐거운 여행 되라는 인사를 남기며 나는 살짝 아쉬움이 남은 채 그를 배웅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또 다음날, 그다음 날까지도 그는 나를 보러 내려왔다. 나는 저녁까지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그는 일주일 중 다섯 번 정도를 시외버스를 타고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나는 그의 소중한 여행 기간을 망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내심 좋았다. 그 사이에 그는 내 외국인 친구를 만나고 싶어 했던 엄마와 오빠도 만나 인사하고 집에서 함께 식사까지 했다. 나는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내 가족 구성원에게까지 낯가림 없이 친밀하게 다가오는 그가 고맙고 좋았다.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그의 서울-청주 왕복 여정이 이어지다 그가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가 떠나기 전날, 역시 그날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그는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밤중에 내게 메시지 한통을 보냈다.


  “돌아가기 전에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내일 갈게.”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독한 회피형 인간인 나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으면서도 조금 두려웠다. 달리 특별한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저 당시의 내가 유독 연애라는 것을 하는 데 회피성 두려움이 있었다. 혼자 고민하던 나는 왠지 도망갈 길을 찾고 싶었다. 날이 밝고 나는 그에게 답했다.


  “나 오늘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미안. “

  “5분이면 돼. 꼭 너를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고작 5분을 위해 두 시간을 달려 내려오겠다는 그의 말에 피할 구석이 없었던 나는 결국 “알겠어, 이따가 보자.”라는 답장을 남긴 채 조마조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안녕.”

  터미널에서부터 내가 사는 동네로 오는 버스의 문이 열리자 그가 서 있었다.

  “안녕, 이제 정말 잘 찾아오네.”

  “그럼. 여기까지 오는 길은 이제 다 꿰고 있지.”


  해가 질 무렵 만나 함께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좀 걸을까?”


  나는 그를 동네 작은 공원으로 안내했다.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들을 나누며 느릿하게 걷다가 벤치가 보여 잠시 앉았다 가기로 했다. 아주 짧은 적막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한국에서는 보통 어떻게 연인 관계가 돼?”


  아, 올 것이 왔구나. 그때부터 내 뺨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음, 보통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고 지내다가, 누군가 먼저 ‘사귀자’는 말을 하고 승낙하면 그때부터 연인 사이라고 해.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

  “재밌다. 우리는 보통 느낌 상으로 어느 순간 연인이 되어 있는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그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그럼 여긴 한국이고, 넌 한국인이니까 한국의 방식대로 해볼게.”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밤하늘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나의 숨소리에 맞춰 작게 떨리고 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미카는 다시 벨기에로 떠나갔다. 그 이후로는 뭇 장거리 커플과 비슷한 방식으로 연락을 하고 연애를 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을 맞았다. 다툰 일도, 미워한 일도 없이 어쩔 수 없는 정말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살다 보니 지금은 연락이 끊어졌지만,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그때가 가끔씩 문득 머릿속에 들어온다. 순수한 그 감정을 지금 돌아보면 귀엽기도 하고, 그저 예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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