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곳은 온통 하얗다. 눈을 깜빡이자 펼쳐진 이곳은 그 무엇도 없이 하얀 어둠만이 가득한 곳이다. 저 멀리엔 검은 빛이 보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조금만 더 걸음을 옮기면 닿을 것만 같은데,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달려도, 몸을 내던져도 아득한 저 검은 빛엔 닿을 수가 없다. 알고 있음에도 기다린다. 언젠가는 닿으리라, 언젠가는 온몸으로 저 온기를 다시 온전히 받아내리라.
나의 J. 이건 너에게 처음 보내게 될 편지야. 책상 서랍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쌓여있는 저 편지들도 언젠가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잘 지내? 사실 난 잘 못 지내. 하지만 곧 잘 지낸다고 말할 수 있게 되겠지. 어느덧 뺨에 닿는 공기가 제법 가벼워졌어. 요즘은 가끔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해 질 녘에 산책을 나가곤 해. 그럴 때마다 내 손을 잡고 따듯하다며 웃던 너의 모습이 그려져.
J, 향기에는 추억이 담겨있대. 온기도, 싸늘함도 없는 늦가을 해 질 녘의 텅 빈 바람의 냄새, 그 공허하고도 자유로운 향을 가지고 있던 네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아. 이제는 어둠뿐인 내 세상에 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색색의 빛이 스며든다는 걸 넌 알고 있을까? 그런 네가 어디서든 행복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
그나저나, 내 글씨가 읽을 만한 꼴이었으면 좋겠는데. 엉망진창이어서 네가 읽는 데 고생하면 어쩌지. 이제 와서 조금 부끄러워진다.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나 길게 하게 되었네. 그럼 이만 줄일게.
늦가을의 끝에서, R.
1.
-임대-. R은 촌스러운 모양의 글자가 큼지막하게 걸린 썰렁한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여섯 대 째 태우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 아름다운 시간들을 붙잡아 사람들에게 전시하겠다며 자신만만하게 문을 열었던 R의 작은 미술관은 일 년이 채 되기 전에 망해버렸다. 검은 얼굴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텅 빈 눈동자가 이리저리 의미 없이 굴러갔다. “아.” 쾨쾨한 연기를 뚫고 R이 나지막이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있던 담배가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여기 금연구역인데요.”
R이 고개를 슬쩍 들자 부러질 것 같은 목발 다리, 꼬질한 슬리퍼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작은 발가락이 보였다.
“아는데요.”
“그런데 이러고 있는 거야, 양아치씨?”
어딘지 어눌하게 늘어지는 투명한 목소리가 약 올리듯 말을 맞받아치자 R은 고개를 들었다. 붉은 기를 한가득 머금은 곱슬머리를 한 채, 제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미소를 띤 J가 R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속했잖아, 그치?”
“늦게 왔으면서 말은.”
“그렇다고 이렇게 처량하게 앉아 있을 건 뭐야. 이만 놓아주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죽어서 지박령이나 안 되면 다행이겠다.”
R이 툴툴거리며 일어나 떨어진 담배를 발로 비벼 희미하게 남아있던 불씨를 껐다. 그리고는 어딘가 빗나간 초점으로 괜스레 J를 노려보았다.
“미안. 이거 찾느라.”
J는 머쓱하게 웃으며 보청기를 끼운 한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J의 주변을 맴돌던 R의 시선은 묘하게 J에게 맞았다 빗나갔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발치로 떨어졌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J는 물거품처럼 위태로운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 담배 냄새 나.”
J는 작게 키득이며 R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쩌면 마지막이니까. 네 목소리 맘껏 담아둬야지. 안 그래?”
“그래.”
R은 J의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눈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너한테서는 바람 냄새가 난다.”
“그래?”
“너 때문에 늦어졌잖아. 해 다 지겠다. 가자.”
R과 J는 바람에 차가워진 손을 마주 잡았다.
2.
갑작스러운 사고였다. 그는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자유로이 이곳저곳을 누비던 바다의 물결과도 같았다. 그날은 폭풍이 오기 직전이었다. 늘 그렇듯, 폭풍 직전에 온 세상이 고요함에 잠들고, 붉은 곱슬머리의 J마저 한순간 그 끔찍한 정적 속으로 휩쓸려 가고 말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왼쪽 귀는 아주 멀어버렸고, 오른쪽 귀는 둥둥 떠다니는 소리만을 힘겹게 들으며 서서히 멀어가고 있었다. 살랑살랑 춤을 추던 다리는 절게 되었다. 맑고 또렷하던 목소리는 늘어진 테이프처럼 어눌해졌다. 그의 주변에서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갔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휩싸여 그의 목이 조여왔다. J는 어느 날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정처 없이 헤엄치듯 엉성하게 달리던 그의 발이 멈춘 곳은 해 질 녘 노을이 반사된 통유리가 반짝이던 작은 건물이었다. 어딘가 음산했지만 신비로웠다. 그는 알 수 없는 끌림에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작게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구겨진 보라색 정장을 입은 R이 J를 맞이했다. J는 R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밝은 호박색 눈동자가 노을을 담은 듯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눈은 살짝 찌푸려져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J는 오묘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비추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점점 어둠에 사라질 것이란 걸 R은 처음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밝게만 빛나던 세상의 빛이 하나둘씩 흐려지더니, R의 시야에는 더 이상 선명하게 제 모습을 유지한 것이 없었다. 머지않아 그녀의 세상엔 어둠밖에 남지 않을 것을 어렴풋이 느낀 R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썰렁한 공간이었지만 그곳에서 R은 꿋꿋이 홀로 그녀의 모든 순간들을 남기고 있었다. 절망감에 지쳐 가라앉고 있던 R의 앞에 J가 불현듯 그렇게 나타났다.
“저, 그림들을 보고 싶어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작고 소심하게 내뱉은 J의 목소리는 어눌하지만 물방울처럼 투명했다. R은 홀린 듯 J를 바라보았다. J의 어깨너머 반쯤 열린 유리문틈 사이로 저녁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날 R은 바람에 묻은 J의 냄새를 느꼈고, J는 공간에 가득한 R의 온기를 느꼈다.
3.
붉은빛 곱슬머리와 흑색 단발머리가 바닷바람에 나란히 흩날렸다. 둘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바닷길을 따라 걷다가, 파도거품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R의 눈엔 J의 주근깨 가득한 얼굴 밖에 보이지 않았고, J의 귀엔 낮게 흥얼거리는 R의 작은 콧노래 밖에 들리지 않았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공간엔 달리 덧붙는 시선도 수군거림도 없이 오롯이 둘만 존재하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너무 흐릿하고.”
J는 R의 손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R의 손등 위로 스치는 그의 손가락이 작게 떨리다 R의 손을 꼭 잡았다.
“따듯하네, 너는 언제나.”
“원래 살아있는 사람은 따듯해.”
“네 온기가 그리워지면 어쩌지.”
“치료받으러 가는 것뿐이잖아. 잘 받고 돌아오면 되지.”
“무섭다. “
J가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국 내 두 귀가 다 멀어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의미 없이 돌아왔을 때 넌 이미 날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땐 어쩌지? 그런 우리가 다시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까?”
“있지,”
들쑥날쑥한 목소리로 읊조리던 J의 입술을 빤히 보던 R이 그의 호흡을 가로챘다.
“내 눈이 멀고 네 귀가 멀어서, 온통 어둠뿐인 고요함에 빠져 버리더라도, 난 너의 향기를 맡고 넌 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지금처럼 말이야. 결국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될 거야.”
해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00.
흰 블라인드가 걸린 창문의 살짝 열린 틈새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와 R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매만졌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낀 R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을 때와 다를 것은 없었다. 아무런 감각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낯선 세상의 허공을 하염없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온기도 싸늘함도 없는 바람의 냄새만이 가득했다.
“글씨 쓰는 연습이나 해야겠다.”
아무렇게나 시선을 던진 채 R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