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운명의 수레바퀴
18세기 조선시대 이름난 사대부 집안이자 왕실의 외척, 권력의 정점의 있는 강만호의 둘째 아들, 그게 바로 강우현이다.
"아버님, 소자 왔습니다."
"그래, 이리 앉거라."
"이제 너도 과거 시험을 곧 볼 텐데 그전에 선산에 먼저 들러 조상님께 인사하고 과거를 보러 가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 그것도 권력의 중심에 있는 강 씨 집안의 아들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때에 맞춰 조정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 강 씨 집안의 지금과 같은 부귀영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미리 짜놓은 장기판의 말처럼 움직여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겨야 하는 것까지 정해진 인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히 여겨져 왔던 삶, 그것이 강우현의 인생이었다.
강우현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삶이 그에게 전부라는 것을.
그러나 작은 일렁임 조차 없던 그의 고요한 연못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졌을 때, 그 파장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그의 연못, 아니 그의 세상을 뒤집어버렸다.
조그만 그 작은 돌멩이 같은 그 여인이 강우현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강우현은 비로소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 가려 보이지 않았던 텅 비어 있던 그의 마음에 그녀가 닿자, 그녀의 빛이 그의 텅 빈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두웠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서늘함도 그 여인의 따뜻함을 알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여인의 빛이 영원하길 바랐다. 그 여인이 그를 계속 밝히길 바랐다. 다시는 그의 마음이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닷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양의 저잣거리]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전 한양의 저잣거리를 거닐던 강우현의 눈길이 한 곳에 멈췄다.
"아니, 술을 마셨으면 돈을 내야 할 것이 아니오. 이번에도 외상값을 갚지 않으면 관아에 고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작고 가느다란 여인이 자신의 두 배 만한 남정네들에게 대차게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동그랗고 큰 눈에 담긴 눈빛은 총기가 가득했고 화가 나 앙 다문 작고 통통한 입술은 야무져 보였다.
강우현은 왜인지 모를 호기심이 생겨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여인을 계속 바라봤다.
남정네들 세명 중 가장 덩치 큰 한 명이 앞에 나서서 그 여인을 위협했다.
"아주 이게 겁대가리가 없네. 술 새로 담갔다더니, 맛이 영 가서 못 먹겠더구먼!
그 술 먹고 밤새 설사에 시달려서 죽다 살아났는데, 뭐 돈을 내라고? 미쳤어? "
"그냥 얼굴 반반해서 조용히 이 정도로 넘어갈까 했더니. 이래서 나쁜 것들은 봐주면 안 된다고!
의원에서 약 짓게 약 값까지 내놔! 나야말로 약 값 받아야겠구먼. 확! 씨!"
솥뚜껑 같은 크고 두툼한 손이 허공에서 여인의 머리를 향해 내려갈 때,
누군가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여인은 눈을 질끈 감고 몇 초가 흘렀을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조심스럽게 반쯤 눈을 떴을 때,
눈앞에 옥색의 비단이 햇빛에 비춰 옥빛이 이리저리 눈부시게 흩날리고 있었다.
눈을 다 떴을 때 옥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한 사내가 여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솥뚜껑 같이 보였던 남정네의 손은 옥색의 두루마기 사내에게 잡혀 옴짝 달짝 못하고 있었고,
남정네의 얼굴은 미간에 내천자가 그려진 채로 죽상을 하고 있었다.
"외상값을 이런 식으로 갚으면 안 되지."
사내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의 어조는 단단하고 강직해 보였다.
"자 옛다." 덩치 큰 남정네는 허리춤에서 몇 푼을 땅바닥에 던지고 무리들과 함께 도망치듯 뒷걸음쳐 달아났다.
여인은 땅에 떨어진 몇 푼을 줍고 옥색의 두루마기를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이제껏 이렇게 잘 빚어놓은 백자같이 귀티 나고 잘생긴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이리도 빨리 뛸 수 있었던 것인가.
난생처음 느껴보는 북소리 보다 크게 느껴지는 심장소리에 여인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 저기...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괜찮소." 남자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여인은 무슨 용기가 났는지 그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어서였을까.
"요 앞에 있는 약방 건너편에서 주막에 오셔요. 제가 보답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그 여인의 동그랗고 큰 눈에 담긴 깊은 밤처럼 까맣고 빛나는 눈동자가 강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우현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그 여인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것인지,
자신이 그 여인의 깊은 눈동자에 갇힌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말을 끝내자마자 두 뺨은 복숭아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급한 일이 라도 있는 것처럼 강우현의 옷자락을 스쳐 주막 쪽으로 달려갔다.
강우현의 입은 무언가를 말하다 끝맺지 못했다.
"이름....."
[그날 저녁]
"들어오려면 들어오고 말라면 말지, 왜 입구에서 똥 마려운 개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고 왔다 갔다... 나... 원... 정신사 나워서..."
장승같이 크고 훤칠한 사내가 주막 입구를 왔다 갔다 번잡스럽게 움직이는걸 수상히 여긴 주모는 사내에게 다가가 물었다.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강우현은 잠시 당황하여 주저하는 듯하더니 이내 작고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키는 한 내 가슴 정도 오고, 눈이 동그랗고...."
강우현이 이 말을 하고 말끝을 흐리자 주모는 더 수상하게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강우현은 "눈동자이 밤하늘처럼 까맣소. 참으로 고운..."
마음의 소리가 입으로 튀어나와 버린 강우현은 아차 싶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주모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연이 찾는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