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나우 유 씨 미
'아니 왜 알람이 안 울리지?'
설희는 눈을 잠결에 반만 뜬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뭐야! 이거 왜 초기화된 거야? 아... 망했다..."
'잠깐 8시?' "뭐 8시!!!!!!!!"
놀란 설희는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일어섰다. '아, 토요일이지.' 하고 안도하는 순간,
그때 설희의 눈앞에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동시에 설희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아악!!!!!!!!!!!!!!!!!!!"
설희의 침대 위에 남자가 있었다.
하얀 피부와 작은 얼굴에 곧게 뻗은 턱선. 아치형으로 자연스럽게 자란 부드러운 눈썹, 그리고 그 밑에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 쭉 뻗은 높은 콧대를 따라 콧방울 밑으로 떨 지면 또렷한 인중 밑으로 도톰 한하고 붉은빛이 차오른 입술.
설희는 저 완벽한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잠시 감탄하다가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많이 본듯한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창문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그때 남자의 얼굴 앞에 있는 설희와 눈이 마주쳤다.
설희는 순간 너무 놀라 뇌의 회로가 정지된 채로 그를 한참 바라봤다. 설희는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본인이 지금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인지가 되지 않았다. 인지부조화를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거 어떻게 된 건데..." 설희가 황당한 얼굴로 혼잣말을 반복했다.
'야 민설희...!!!!!!!!!!!!!!!!!!!!!!!!!!' 가슴속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할 수 있다면 어제 본인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의 설희였다.
남자는 침대 옆에 떨어진 하얀 와이셔츠를 집어 들며 설희를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설희의 정지된 뇌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한 장면이 머릿속에 스치고 갔다. '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내가 술집에서 봤던 남자인가... 아니 도대체 어디서...... 아! 그... 그... 내 꿈속의 남자다!'
"그...... 꿈속...... 맞아요?"
'포브스 선정 올해 제일 멍청한 질문 1위. 원나잇한 다음 날 제일 구린 사람 1위. 그게 바로 나야 나...'
설희는 본인도 모 르네 불쑥 그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말을 하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을 한탄했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확 달아올라 재빨리 시선을 피하고 말했다.
남자가 흥미롭다는 듯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설희를 보며 말했다.
"꿈? 무슨 꿈? 아..." 잠시 생각하는듯하더니 이내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리고는 셔츠의 단추를 마저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꿈에서 나온 건 모르겠는데, 당신한테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꿈을 미리 꿨다는 건 기억한다는 얘기일지도 모르니까."
설희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약간 어리둥절하면서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래서 저한테 누구신데요?"
"서방ㄴ... 아니 남편이요. 당신 남편." 남자의 눈빛이 깊고도 반짝거렸다.
"네??? 뭔 편이요?? 남편???."
'내 얘기 어이없다고 이렇게 나오는 건가. 혹시 지금 나 먹이는 중? 개소리는 개소리로 받아친다는 거야 뭐야.'
"진짜라서 그렇게 물어본 건데..." 설희가 혼잣말로 작게 속삭였다.
설희를 보고 무언가 눈치챈 듯이 남자는 말했다.
"나도 진짠데. 기억 안 나요?"
점점 짜증이 난 설희는 "아 됐고요. 지금 저랑 스무고개 해요?
어떻게... 그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러니까 여기에 어떻게 계신 거냐고요?
물론 저도 잘했다는 거 아닌데 뭐 그쪽도 잘한 거는 없어 보이고, 암튼 각자 성인이니까 깔끔하게 해결하자고요."
설희는 그의 양복 재킷을 집어 들어 그에게 팔을 뻗었다.
"자, 여기 있어요. 이제 그만 가주세요."
남자는 재킷을 건네받는 척하면서 설희의 팔목을 잡았다.
"우리 그래도 아침 먹을 사이 정도 되지 않을까요?"
"아침은 무슨 아ㅊ......." "꼬르륵" 설희의 뱃속은 허기짐으로 우렁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설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 사라지고 싶다... 이런 미친'
남자는 설희를 보며 생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숨기는 건 못하네.'
남자는 설희의 눈높이에 맞춰서 허리를 숙이며 싱긋 웃으며 얘기했다.
"뭐 좋아해요?"
[해장국집]
"이모님~ 여기 순댓국 2개요."
이모님이 순댓국을 가져다주며 그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설희를 보며 말했다.
"누구야? 남자친구야?"
설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가 이모님의 질문을 가로채고 얘기했다.
"아니요."
"남편입니다."
"왐마마! 결혼혔어~? 아가씨 아니었어? 언제 결혼했대?"
이모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설희를 보며 말했다.
설희는 애써 억지로 웃고, 손을 흔들며 아니라는 제스처를 하며
"아니에요 다 아니에요. 그냥 농담하는 거예요. 하하하... 남편은 무슨..."
'미친놈 아니야? 아... 정말... 미쳐 버리겠다. 잘생긴 미친놈이라니...... 하필... 아 씨..'
아주머니가 간 후에 남자는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데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볼 거 못 볼 거 다 봤으니까 이름 정도는 그냥 지나가시죠. 굳이 이름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주기도 싫은데요."
그때 설희 핸드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딩딩 딩딩딩~ 설희는 전화받다가 스피커폰을 잘못 눌렀다.
("야 민설희!!!!!!!!!!!!!!!!!!!!!!!!!! 너 어제!!!... 뚝...")
수영의 목소리는 해장국 가게 안에서 못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가게 전체로 울려 퍼졌다.
설희는 황급히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 먹을 때까지 뚝배기에 코 박고 말썽이 해장국을 열심히 먹었다.
'아 사라지고 싶다. 젠장...'
"전 다 먹었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천천히 마저 드시고 가세요."
남자는 뒤돌아 나가려는 설희의 팔목을 붙잡고 말했다.
"제 이름은 강우현입니다. "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설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둘의 손이 예기치 않게 맞닿았고 설희는 갑자기 몸에 열이 오른 듯했다.
주머니에 명함을 넣고 설희는 도망치듯 해장국집을 빠져나왔다.
남자는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들뜬 사람처럼 활짝 웃으며 설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설희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심장 때문에 머리까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 심장아 나대지 마라 진짜...' 하다가
자꾸 머릿속에 그의 부드럽고 빼곡한 까만 머리칼, 뺨, 날렵한 턱선, 쭉뻗은 콧대, 도톰하고 붉은 입술, 얼굴에 비해 굵은 목에 튀어나온 목젖, 감싸안던 큰 손, 긴 손가락, 그리고 그 조각 같은... 몸이
자꾸 설희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불쑥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아악... 내 현생 어떡하냐...' 하며 머리를 움켜쥘 때 설희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수영이었다.
"야!!! 민설희!!!! 너 어제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아냐 갑자기 편의점에서 맥주 사러 간다더니 사라져서..."
"아... 나 집에 갔어... 술에 너무 취했는지 미안. 진짜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너도 잘 들어갔어?..."
"왜? 너의 18765가지의 무궁무진한 술버릇에서 본 적 없는 게 바로 귀소본능인데... 흠..."
"야 나는 못 속여. 어제 너 무슨 일 있었지? 뭐야? 말 안 하기냐! 우리 우정 하찮은 건 알았다만... 이 정도구나 진짜."
설희는 귀신같이 눈치 빠른 수영 때문에 할 수 없이 어젯밤 일들을 얘기했다.
"아 알았어. 사실은 어제......"
설희의 말을 듣고 수영은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웃기만 했다.
"야 계속 웃기만 할 거면 끊는다."
"간밤에 남편도 생기고, 와우 6G보다 빠른 그녀의 초고속 인생. 내 친구한테서 할리우드스타 향기가 난다."
수영은 이제 너무 웃어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설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뭔 소리야?"
"야 근데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뭐 서로 통성명정도는 했을 거 아니..... 닌가?
와!!!! 대박!!!! 민설희!!!!
어제 대체 무슨 각성을 하고 깨어난 거야? 와!!!!!!!!
이제 언니로 모신다. 고수네 고수야.
비루한 저에게 한 수 알려주시지요~"
설희는 수영과의 통화의 숙취가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아 진짜 실컷 놀려라 놀려... 끊는다."
설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순간 아까 아무렇게나 찔러놓은 그 명함이 만져졌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명함을 꺼내 찬찬히 보았다.
"강.. 우.. 현... 해냄로펌 변호사..."
[길거리]
"오늘은 왠지 떡볶이에 튀김 먹고 싶은데... 좋아 오늘은 떡튀순으로 가자~!!!"
여자 행인 두 명이 지나가면서 하는 얘기를 무심코 듣다가 머릿속에 번뜩하고 무언가 생각이 탁 떠올라 갑자기 설희 눈과 입이 커졌다.
"변호사라... 투... 투... 설마 먹.... 튀...!!!!!! 나 고소하는 건 아니겠지?.......!!"
설희는 긴장된 표정으로 초조하게 핸드폰 문자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런 초조함과 불안한 마음에 초등학교 때 이후로 고쳤던 손톱을 다시 물어뜯고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눈을 질끈 감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안녕하세요. 강우현 씨.
집은 잘 들어가셨는지요. 아까는 제가 경황이 없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민설희입니다.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혹시나 저로 인해 언짢으셨다면 정중하게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만약 오해가 있으시다면 대화로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그 시각 강우현의 집]
(띵동)
강우현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씩 웃는다.
그리고 문자 온 번호를 눈으로 확인하며 저장버튼을 눌렀다.
망설임 없이 이름을 '연이'라고 누르다가
슬픈 건지 기쁜 건지 구분 안 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지웠다.
"민설희..."라고 작게 읊조리며 휴대폰을 한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