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연 Sep 01. 2024

제1화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제1화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설희의 집]


 부드러운 살결. 하얗다 못해 환한 피부. 그리고 익숙한 향기.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

매끄럽고 고운 피부와 어울리지 않게 들어있는 단단한 몸이 순간적으로 설희의 살결에 닿았다.  


넓은 어깨와 잔잔한 근육이 조각되어 있는 긴 팔과 그 위로 도드라진 핏줄, 허벅지에서 한참을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그의 발목, 얼굴을 전체를 한 손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크고 가늘고 긴 손이 설희의 몸을 감싼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은은히 퍼지는 그의 살냄새. 그의 살냄새는 언제나 은은하게 달달하면서도 신선한 꽃향기가 났다. 달콤한 그의 살냄새의 취해 설희는 단잠에 빠져들었다.


설희는 한 달 넘게 매일 밤 같은 꿈을 꾼다. 얼굴도 모르는 한 남자가 나오는 꿈. 그 남자와 설희는 꿈속의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다. 이상할 것도 없이, 더할 생각도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몸을 맡긴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같이 느껴졌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꿈 속이지만 그와 같이 있을 때는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잠에서 깨면 설희는 자신의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혼자 산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간 혼자 사는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설희도 그 순간만큼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편하게 자고 싶어 크게 샀던 퀸사이즈 침대 위 설희 배게 옆 빈자리가 외로움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딩댕딩동딩 딩동딩동딩 빠빠빠 빠ㅃ"


'아 지구 안 망했나. 이 망할 놈의 회사.' 설희는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 아침을 맞이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부터 확인하던 설희는 아침부터 모바일 첩정장이 온 걸 확인하고 진심으로 지구가 망하길 빌었다.  



<대학동기 그룹 채팅창>

진희: 얘들아 나 결혼해~ 드디어 날 잡았어><


세희: 어머어머!!! 진희야 너무 축하해~ 너도 유부의 세계로 오는구나!


유나: 난 이미 알고 있었지~ 내가 부케 받기로 했거든~히히

나도 이번 가을에 결혼해~ 얼마 전에 오빠한테 프러포즈받았어 : D


영지: 오 다들 축하한다!!! 이제 하나둘씩 가는구먼~ 이제 남는 건 설희와 나뿐이네.  우리는 화려한 싱글의 자리 지키고 있을게!ㅋㅋㅋ


설희: 그래그래 암 그렇고 말고~ㅋㅋ 진희야 정말 축하해~ 유나도 축하하고^^


진희: 청첩장은 만나서 줘야지~ 언제 시간 괜찮아? 주말로 내가 시간 한번 잡아볼게~

이번주는 오빠 친구들 만나서 다음 주쯤? 내가 식당 예약하고 연락할게~!!



화려한 싱글의 자리를 지키긴 개뿔. 그런 건 지킬 생각이 없었다고. 음악이 끝나면 짝짓는 게임처럼 그저 타이밍이 맞아서 하는 결혼이 싫었을 뿐, 결혼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 사람과 함께 그 자체로 꽉 차는 내 인생, 흔들리는 의자 다리 밑에 받쳐진 무언가 처럼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나의 삶에 안정이 되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다.


35세 중견기업 대리.

여자 입사동기들이 하나둘씩 결혼과 출산으로 경단녀가 되었고, 그들의 빈자리를 설희가 지키고 있었다.

결혼만이 인생의 행복이 아니듯 남들이 보는 커리어우먼의 삶도 나쁘지 않았다. 본인의 자아를 실현하며 유리천장도 뚫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 부딪치고 사람에 부딪치며  닳고 달아 특색 없이 무뎌져 버린 설희는 회사는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에 치여 잊고 있던 유리천장은 가끔씩 위를 올려볼 때마다 항상 설희 위에 존재했다.


회사는 매달 통장에 꽂히는 월급을 위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설희는 알맹이 없는 자신을 들킬까 두려워 사회적으로 그럴싸한 커리어우먼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설희는 불현듯 한 두 달 전쯤 20년 지기 절친 수영과 부산여행 갔다가 사주를 본 일이 생각났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경오생 양력 사 월 십오 일생 묘시 명은 민가 베풀 설에 기쁠 희......"

수영과 설희는 무속인의 잠깐의 침묵의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침도 목 뒤로 못 넘기고 정지화면처럼 멈춰있었다.


설희는 취업면접 이후 이렇게 떨리는 순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긴장이 됐다.

속으로 무엇인지 모를 존재에게 '제발 제발' 하며 간절히 빌고 있었다.


무속인이 고개를 기웃하며 입을 떼었다. "참...... 희한하다. 희한해."


"네? 뭐가요?" 설희 옆에 있던 수영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흐릿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무속인의 애매한 말에 이번엔 설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말 그대로야. 흐릿해. 그렇다고 없는 건 아니야. 근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혹시 총각귀신이 붙은 건가? 밤마다 찾아오고 그러는 총각귀신 말이야. "


무속인의 황당한 점괘에 수영은 웃음이 비 짓고 나오는 걸 참느라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벌게졌고,

설희는 팔자에 남자가 흐릿하다는 것도 모자라 그 남자가 총각귀신이라는 말에 더 열받아서 양 볼은 잘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고 이내 귀까지 달아올랐다.


"어이없어. 복비 아까워 죽겠네. 그 돈으로 술이나 먹을걸." 설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얼굴을 향해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하!!"


수영은 안 웃으려고 심호흡을 크게 해댔다. 후후후

"야 근데 마지막에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설희의 섬뜩하게 째려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눈치가 빠른 수영은 재빨리 말을 돌리며 이 분위기를 무마시키려는 듯 다소 과장된 억양으로 말했다.


"야 다 미신이야. 뭘 또 그렇게 믿고 그러냐. 내가 술 사줄게. 네 복비랑 퉁쳐!"


"딴말하기 없기다. 콜!"


그때 설희의 눈에 근처에 있는 절이 눈에 띄었다.


"우리 저기에 잠깐 들렀다 가자." 설희는 손가락으로 영궁사라고 적힌 절을 가리켰다.


수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절? 왜? 뭐 소원이라도 빌려고?"


"응" 설희의 이 짧은 대답은 약간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왜인지 모를 찜찜함에 생존본능 같은 것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진짜? 갑자기 왜 샤머니즘에 매달리는 거야? 저기 또 올라가야 하잖아. 그냥 술 마시러 가자니까. 힘든데......"

수영은 툴툴거리며 설희를 따라 걸었다.


영궁사에 올라가 바닷바람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며 절 가운데 우뚝 솟은 커다란 불상 앞에서 빌었다.


 '총각귀신 말고 만질 수 있는 제 남편을 주세요!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제발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설희는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무슨 소원이 길래 이토록 간절할까 생각이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수영이는 속으로 '쟤가 왜 이렇게 진지해...'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저런 설희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절 가득히 분홍빛으로 물들인 복사나무가 흩날리고 있었다.


청량한 바닷바람의 향기와 은은하게 달달한 꽃향기가 어우러져 코 끝을 스치었다.

'어...? 이 향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