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고정간첩이 주요 소재입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남파된 고정간첩의 삶과 그의 주변부를 철저하게 '생활'의 관점에서 훑어낸 작품입니다. 간첩의 삶도 삶이요 안기부 직원의 삶도 삶입니다. 고정간첩의 아내의 변태(?)스러운, 그리고 은밀한 사생활도 삶의 한 단면이며 친구에게 기습 키스를 당하는 그의 딸의 모습도 마찬가지로 삶의 한 모습입니다. 소재가 조금 독특할 뿐이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측면에서는 사실 다른 소설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즉, 간첩이 주인공이기는 하나 이념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념의 병풍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그리는데 집중합니다.
꽤 재미있게 잘 쓴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읽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2 김영하, '빛의 제국' vs. 류승완, '베를린'
이 작품을 읽는 중에 류승완 감독이 베를린 개봉 후에, '영화는 수다다'에 출연해서 한 인터뷰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제가 정작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판 안에 있는 개인들의 문제였어요. 자기가 누군지 물을 틈이 없이 자기 일로써 자기를 증명하려고 그러잖아요."
판 자체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또는 그 안에서 고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집중하고 또 그려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빛의 제국'과 '베를린'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때로는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이고 그 안에서 본인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갑니다. 사실 이 두 작품에서 이념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이냐, 내 삶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에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조국과 민족, 그리고 국가'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안기부 직원들도 여타 월급쟁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이 두 작품에서는 그려집니다)
판이 사람을 움직이기도 하나 결국 그 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치열한 삶을 사는 개인들임을 이 책과 영화를 통해 얻었다면 너무 앞서가는 것일까요? 사람들의 삶을 이념의 병풍으로 사용하지 않고 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3 문장과 문체
김영하 작가의 통찰력 있는 문장들을 좋아합니다. 그의 산문집도 여러 권 읽었고 또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인터뷰도 여려 번 보면서 그의 세계(?)를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요, 소설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특히 그의 조금은 무심한 듯 무관심한 문체는 도리어 사실감을 높여주기도 합니다. 인물들을 삶을 정확하게 그리되 일정 부분 이상은 개입하지 않고, 선을 긋고 언저리에서만 움직이는 것이지요.
게다가, 멋진, 그리고 통찰력 있는 문장들도 많습니다.
운전을 잘하는 남자들에게선 과시욕이랄까, 그런 것이 풍기지만 주차를 잘하는 남자에게는 섬세한 집중력이 있다.
차도남(차 없는 도시남)이라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런 문장은 정말 섬세한 관찰력과 깊은 사고가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문장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에겐 왜 복수의 문화가 없을까?"
...
"내 생각에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서양 사람들처럼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까 복수도 맥이 빠지는 거야. 알고 보면 개들도 다 불쌍한 놈들이다, 이런 식으로 끝내잖아."
두말할 나위 없이, 100% 동감합니다. 옳고 그름보다는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훨씬 강한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닌가 합니다.
깨끗한 인간이란 없다. 아직 그럴듯한 유혹을 받지 않았을 뿐.
이 책에서 발견한 최고의 문장입니다.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4 아쉬운 점 - 너무 많은 캐릭터들, 과하게 설정된 캐릭터
우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캐릭터는 주인공의 아내가 근무하는 자동차 판매점의 지점장. 솔직히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힘은 좀 많이 준 캐릭터 같은데 들어간 힘 대비 얻은 것이 별로 없는 등장인물인 것 같습니다.
둘째, 주인공의 딸인 현미의 친구인 '진국'이라는 캐릭터와 그의 기묘한 동거인 친구, 왜 등장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셋째, 아내인 마리의 변태적인 불륜 행위는 어떤 상징적인 또는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권태기에 빠진 아줌마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
# 인상 깊은 문장들
있을 때는 아무 주목도 끌지 못하던 애였지만 사라짐으로써 모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되는 건 되니까 되는 거다."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해도 된다는 것이고 신도 허락한 것이다."
운전을 잘하는 남자들에게선 과시욕이랄까, 그런 것이 풍기지만 주차를 잘하는 남자에게는 섬세한 집중력이 있다.
낙원이라니. 히틀러가 그랬다던가. 대중들은 큰 거짓말에 속는다고.
"여자들의 나쁜 점만 다 가진 존재, 그게 바로 젊은 여자예요."
"우리에겐 왜 복수의 문화가 없을까?"
...
"내 생각에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서양 사람들처럼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까 복수도 맥이 빠지는 거야. 알고 보면 개들도 다 불쌍한 놈들이다, 이런 식으로 끝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