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는 어떤 사람인가요?

탁월한 이론가요 철학자입니다

by 생각창고

# '서양에 마키아벨리가 있다면, 중국에 한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비는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자 철학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저서인 '한비자'가 그리 인기있는 책은 아니며(논어나 맹자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해 알려진 바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은밀하게 읽는 사람들만 읽는 책 중 하나가 이 '한비자'일 것 입니다.


# 펑유란(1894~1990)은 그의 명저 '중국철학사'에서 통치자들의 통치행태를 '외유내법(外儒內法)'이라고 정리할 정도로 유가 사상에 못지 않게 법가사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즉, 통치자들은 외관상으로는 '유가사상'에 기반하여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질적인 세부 통치 형태를 보면 '법가사상'에 기반하여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법가를 빼놓고는 통치 및 정치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제자백가 시대,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던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한비'입니다. 물론 그의 독창적인 이론도 많이 포함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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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한비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입니다. 그는 55편에 달하는 '한비자'를 저술했습니다. 생존연대가 B.C 280년? ~ B.C 233?년으로 알려지고는 있습니다만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한비의 삶에 대한 그 흔적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리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노자한비열전'으로 묶어서(?) 기록한 것을 보면 한비는 사마천에게 공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사마천은 공자의 일대기를 '사기 세가' 즉 당대의 명사 및 끝발있는 인물들의 평전에 기록함으로써 존경심을 보였고 '중니제자열전'은 '열전'에 별도로 기록을 했는데 한비는 '열전'에 그 기록을 남김으로써 공자의 제자 레벨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접하고 있습니다. 사마천이 한비를 노자와 묶음으로 기록을 남긴 또하나의 이유는 한비자 이론의 상당 부분이 노자의 이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비 자신도 '한비자'에 '해로(解老)'라는 노자 사상에 대한 주석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비자3.jpg '한비자'의 판본 중 일부로 추정됩니다


# 한비의 개인적인 삶은 매우 불우했습니다. 전국시대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공자로 태어났지만 말더듬이였습니다. 한 왕실에서는 그의 정책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등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조국인 한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진시황이 한나라를 침범하려고 하자, 그때서야 한나라 왕은 그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합니다(B.C 234년경). 당시 진나라는 과거 상앙의 변법을 기반으로 국력이 매우 강력해져서 전국 통일을 이루려 각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 이었고 이사를 비롯한 당대의 인재들이 그 뒷받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재상이었던 이사는 한비와 동문수학한 사이였는데 능력이 출중했던 한비가 진시황의 눈에 들어 자신의 자리를 밀어내게 될까 두려워 진시황을 설득하여 한비를 옥에 가두었고 끝내 독살하고야 맙니다. 당시 진시황은 한비의 글을 읽고 '이런 사람을 수하에 두고 쓸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당시 정치적인 상황이 그렇지 못했던 것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한 원인입니다.


# 이쯤에서 공자와 한비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공자와 한비는 요즘 표현을 빌리면, '오너 밑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전문경영인'이 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즉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를 원했던 것이지요. 둘 다 왕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했으며 본인들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1도 없었습니다. 다만 자신이 가진 생각과 철학, 식견을 통치에 적극 반영하여 '부국강병'하고 싶었던 것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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