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엄마는 아주 조용하다.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던 분이
이제는 늦은 오후가 되어도 이불속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신다.
불 꺼진 방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하루가 지나는 날도 있다.
예전에는 동네의 중심이었다.
목소리가 먼저였고, 웃음이 크셨던 분.
그러던 엄마가 이젠 말이 없다.
이불을 들추고 나오는 일조차 벅차 보인다.
침묵이, 엄마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늦은 밤이었다.
엄마는 조심스레 우리 두 자매를 깨우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가 당분간 집에 못 오실 것 같아. 혹시 누가 물으면, 출장 가셨다고 말해.”
그 말을 끝으로 아빠는 긴 시간 우리 곁에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아빠는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일하셨다.
입학식도, 졸업식도 함께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사막 바람을 맞고 있는 사진 한 장,
그리고 집에 놓인 냉장고와 전화기, TV 같은 귀한 물건들로만 남아 있었다.
그 빈자리를 온몸으로 채운 건, 엄마였다.
낮에는 두 아이를 돌보고, 밤이면 집안의 불을 일일이 껐다.
“아빠는 지금 모래바람과 싸우고 계셔. 우리는 물도, 전기도 아껴 써야 해.”
엄마는 아빠의 헌신을 삶으로 함께 짊어졌다.
늘 소식(小食)을 했고, 절약의 시간을 살아냈다.
엄마는 강한 사람이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또렷한 말투.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늘 먼저 엄마를 찾았다.
‘서울 똑순이 영미 엄마’, ‘해결사’ 그게 모두 엄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빠가 귀국한 뒤 작은 공장을 인수하며 사업을 시작하셨지만,
어음이 돌아올 때면 집안 공기부터 무거워졌다.
엄마는 말없이 전화를 받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따뜻한 국을 식탁에 올려놓으셨다.
결국 아빠의 공장은 부도를 맞았다.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꿈은커녕, 대학이라는 단어도 멀어졌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이 깊어갈수록 눈두덩 아래 그림자가 짙어졌을 뿐이다.
가고 싶지 않았던 실업계 고등학교.
그곳은 내 미래가 아닌 현실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원서를 썼다.
어떻게든 엄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날 밤, 엄마는 선생님과 통화를 마친 뒤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조용히 울었다.
목 놓아 울지도, 흐느껴 울지도 않았다. 그저 어깨만 천천히 흔들렸다.
숨죽인 울음이 방 안을 채웠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아픔은 감추고, 아이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덜 고단하길 바라며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던 사람.
고등학교 재학 중, 아빠가 다시 돌아오셨다.
많이 야위었지만 따뜻한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은 말없이 둘러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 눈물은 무너졌던 시간을 다시 이어주는 끈 같았다.
아빠는 다시 새벽 다섯 시에 공장으로 나가셨고,
엄마는 그보다 먼저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밥상을 차리셨다.
나는 졸업 전 취업을 했고, 엄마는 늘 안쓰러운 눈빛으로 식탁을 정리하며
대신 미역국 한 그릇으로 마음을 전했다.
“이제 너는 어른이구나.”
그 한마디 없이도, 충분히 전해지는 사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엄마는 다르다.
아빠와 동생이 세상을 떠난 뒤 엄마는 점점 고요해졌다.
말보다 침묵이, 행동보다 멈춤이 많아졌다.
세상을 누구보다 부지런히 살아내던 분이
이젠 시간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고 있다.
나는 엄마를 잃어가고 있다.
아직 살아 계시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사람.
마음은 여전히 곁에 있지만, 표정도, 목소리도 희미해졌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부엌에서 지글지글 끓던 국물 소리,
“밥 먹자”는 그 한마디.
그 무엇보다 따뜻했던 엄마의 일상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사막을 건너 우리 곁으로 돌아왔던 아빠처럼,
엄마도 언젠가, 마음의 긴 강을 건너 다시 나에게 돌아와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