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러들을 위한 변명
12월에 졸업이다. 당연히 내 졸업이 아니고 우리 반 학생들이 졸업한다. 6학년 담임일 때는 졸업이 가까워 올 때 이런 말을 종종 하곤 한다. "오늘이 마지막 자리 바꾸는 날이야.", "오늘 급식이 마지막 급식이다."라고. 그러면 학생들은 무언가 사무치는 눈빛으로 짝꿍을 바라보거나 급식판을 응시한다. 방금까지 세상 유치한 농담을 던지고, 네가 먼저 했네, 안 했네라며 싸우던 녀석들이 갑자기 시인이라도 된 듯하다.
고작 13살짜리들이지만, 나름 제도권 교육체계에서 6년을 버티고 버틴 친구들이다. 내 말 한마디에 그간 겪었던 세월이 스쳤으려나.
이 녀석들의 인생에는 아직도 창창한 날들이 많이 남았고, 그날들은 물리적으로 어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데 걸린 시간일 뿐, 13살짜리 꼬맹이들이 졸업한다고 해서 어제의 태양이 보다 뜨겁다거나 내일의 하늘은 보다 찬란할 리가 없다.
누구나 그렇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지만 크리스마스라며 전 세계 사람들이 설레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지만 해를 맞이하려 바다로, 산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지 않나. 그리고 그맘때쯤이면 동네 헬스장, 학원 문 지방은 새손님 맞이에 분주하다. 역시 어제와 전혀 다를 것 없이 지구가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오늘은 왠지 새로운 기분을 장착해야 할 것 같다.
인간이라서 가능한 기분 전환이다. 키우던 강아지는 갑작스레 던져준 간식이나 주인 손에 들린 목줄에 산책 간다며 꼬리를 흔들겠지만, 우리는 상징체계에 불과한 달력의 숫자의 변화만으로도 기분 전환을 넘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겠다는 다짐까지 한다. 특정한 자극에 의해 그날의 기분이나 운수를 점치는 게 아니라,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마음에 아로새기는 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여러 기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 담배를 끊으나 내일 끊으나, 다이어트를 방금 도착한 치킨을 먹고 시작하냐 안 먹고 시작하냐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여전히 인간다움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우겨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날, 저런 기념일이 많은 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덕분에 초콜릿을 건네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 '사랑해'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기회도 되지 않는가.
오히려 한 달이 20일로 줄어들어 새 달의 첫날이 빨리 돌아오고, 지구가 속도를 올려 태양 주위를 빨리 돌아준다면 새해 첫날의 작심삼일 이벤트도 자주 벌어질 질 텐데..
이런 글을 쓴 김에 오늘은 아가들에게 어떤 '마지막' 날이라고 말해줄까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