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PC의 World dj festival 2022
축제: 축하하여 벌이는 큰 규모의 행사.
17살 가을. 중학교 동창으로부터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직관 영상을 보고 꼭 한 번 음악축제에 가보겠노라고 버킷리스트를 세웠다. 이후 전자 음악에 광적으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그 버킷리스트는 더 커져만 갔고 전자 음악과 록 음악을 좋아했고 무대 위에 서서 대중을 휘어잡는 뮤지션들을 동경했던 나는 20살을 시작으로 인천과 서울, 부산, 대구의 전자음악축제를 다니거나 클럽을 찾는 일이 다반사였다. 대학축제의 낭만은 20살 딱 하루만 경험했으며 대학축제 대신 음악축제를 찾아다니며 나만의 즐거움과 경험을 쌓아왔다. 군 복무 중에도 휴가를 나가 축제를 경험했으며 코로나 시국을 맞이해서 잠시 죽어있던 문화가 22년도에 다시 개최되고 그 불을 지피던 중 한 번도 가지 않은 페스티벌에 구미가 당겨왔다.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World Dj Festival). 2007년 개최를 첫 시작으로 국내에서 역사가 깊은 전자 음악 축제. 코로나 시국으로 모든 분야가 다 사장됐다. 그런 영향은 공연문화도 무사하지 못했고 침체기를 직격탄으로 맞았다. 하지만 터널 끝엔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침체기 끝에 다시 전자 음악 축제의 시작을 알린 페스티벌. 코로나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그래도 2년 만에 레이빙(raving)을 즐기고픈 나의 딜레마는 결국 발걸음을 서울로 옮기게 했다. 안동이 됐든, 태백이 됐든, 출발지에 관계없이 축제 목적으로 서울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늘 혼자였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두부야, 나도 EDM 즐기게 해 주라."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썩 깊은 연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런 몇 없는 친구들 중에서도 나랑 이상한 면에서 궁합이 잘 맞았던 동창이라 그 기억의 흔적이 독특하게 남아있다. 항상 헤드폰을 쓰고 다니던 내가 신기했는지 벗기고 무슨 음악을 듣는지, 음질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는 소니가 가성비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무슨 브랜드를 사용하는지 등등 정말 뜬금없는데도 뭔가 나 스스로도 여러 브랜드를 접하게 만든 친구였다. 아마 내가 디제잉을 취미처럼 하면서 헤드폰을 비교해 보고 구매하는 건 이때 이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형성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친구가 내게 몇 달 전부터 계속해 온 부탁을 이뤄주러 가는 길이다.
8월 8일 가천대역. 출구 밖 풍견은 비에 가려져 그 앞의 풍경조차 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지도상에 나온 거리는 짧았기에 평소 같았으면 걸어갈 요량이었으나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아 버스를 타고 친구의 집으로 뛰어갔다. 비에 젖으며 뛰어오는 내가 재밌는 듯 담배를 피워대면서 킥킥거린다. 곧이어 들어간 녀석의 방. 이런 좁은 방에서 모든 생활을 해결하는 거에 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여러 개의 가구가 즐비하고 부엌과 거실이 분리된 내 방과는 달리 녀석의 방은 단 하나의 방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실전압축형이었다. 녀석은 입학하고 지금까지 이 방에서 계속 지냈다고 했다. 그러니 드넓은 장소에서 부대끼며 노는 축제를 경험시켜 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이틀 동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방에 찌그러져서 밥만 먹고 누워있던 일상이 다반사였다. 이틀 차 되던 날 저녁에 너무 진절머리가 나서 군대 후임 형님이 하는 닭발집에 녀석과 간단히 맥주를 마시며 축제 전야제를 즐기고 분위기 환기를 했다. 그렇게 밝은 8.11일 목요일. 축제를 간다고 녀석이 한창 들떠있다. 아침부터 스타일링은 뭐 하고 데오드란트를 한껏 뿌리고 멋도 부려보는 그 녀석과 달리 나는 정말 뛰기 좋은 복장과 배낭을 챙겼다. 똥폼을 힘껏 잡은 녀석을 보니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거리니 녀석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활동복으로 환복 했다. 그렇게 버스로 잠실까지 가서 지하철을 타고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저 멀리 들려오는 우퍼소리와 디제이의 호응 유도 멘트. 모든 것이 오랜만이었다. 입장 팔찌로 교환하고 보조경기장으로 들어가니 정말 모든 것이 오랜만이었다. 본격적으로 놀기에 앞서 생수 판매 부스에서 물을 6병 정도 구매하고 예거밤을 두 잔씩 사서 펜스로 향했다. 정해진 형식 없이 놀고 있는 이들과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불,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르니 터지는 폭죽들. 나에겐 벌써 코로나가 종식된 것만 같았고 계속 가슴에 품어온 딜레마에 상관없이 즐거웠다. 친구는 처음에는 어색해했다. 머리를 거위처럼 까딱거리면서 영 즐기지 못하는 녀석을 위해 광대를 자처했다. 처음 보는 무리들과 적극적으로 부대끼며 물도 맞아가며 즐겨대니 이내 어색함을 풀고 한 명의 광인처럼 즐기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고 뿌듯했다.
이틀 차부터는 DDP에서 동시에 파티를 아침 6시까지 진행했다. 잠실에서 본 공연 일정이 8.11-13까지 3일이고 DDP에서 진행하는 애프터 파티는 8.12-14였다. 총 4일간 미치도록 놀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해와 달이 바뀐 일상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녀석은 그게 황홀했는지 마지막 날이 되고는 나보다 더 미쳐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대학교 레이버(raver, 전자 음악 축제에서 즐기는 이들을 칭하는 말.)분들과 친해지고 축제가 끝나고도 다시 만남을 기약했다. 이런 만남과 광기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BEPC만의 시그니처 쇼(Signature show)가 아니었나 싶다.
여러분들의 젊음을 늘 응원합니다.
3일 차 저녁. 캐시 캐시(Cash cash)와 알록(Alok)의 공연 사이에 조명이 꺼진다. 이내 거대한 전광판에는 그들이 직접 제작한 시그니쳐 쇼가 진행된다. 이 점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줘서 이제껏 갔던 페스티벌들은 라인업이 최고였고 해외에서 론칭해 온 물 건너온 값을 하는 축제였던 반면 월디페는 달랐다. 그만의 서사가 만들어진 양과 질 모두를 챙긴 페스티벌이라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향후 터져 나오는 레이저들과 불기둥, 그리고 엄청난 폭죽에 곁들여진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는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이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그들에 대한 경의이자 일상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 기타 등등. 한 곳에 모여 부둥켜안으며 마지막에 나오는 전광판 속 멘트. '여러분들의 젊음을 응원합니다.'. 그렇게 광란의 밤 4일 차. 새벽 6시 일출을 보며 귀가하며 꿈이 끝나가고 있었다.
친구 녀석과 돌아와 술집에서 회포를 풀다 보니 녀석이 센티해진 모습으로 내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기는 이런 경험이 처음인데 정말 좋은 경험으로 하나 남기는 것 같아서 다음에도 가고 싶고 취업 준비하면서 빡빡하게 살고 있었는데 정말 이런 즐거움은 상경하고 처음 느낀다면서 고맙다나 뭐라나. 낯간지러웠지만 첫 날 봤던 표정과는 확연히 다른 채 털어놓는 녀석의 모습에 괜스레 나도 고향 친구와 처음으로 즐긴 축제를 만족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다양한 것들을 즐기고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들을 한 곳에 모아줌으로써 뭉치게 만들고 황홀한 경험을 심어주는 축제는 입이 마르게 얘기해도 그 가치 전부를 담아낼 수 없다. 축제를 다녀오면서 더 부각된 좁은 방이었지만 첫날 왔을 때 우수에 가득 찬 표정과는 달리 설렘과 즐거움,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로 얼굴에 드러났고 좁고 습한 방도 서광이 비춰오니 제법 그 느낌이 좋았던 거 같다. 우리는 아직 젊고 즐길 것도 많고 음악도 많다. 근심걱정 다 내려놓고 음악에 몸을 맡기는 경험은 삶을 더 윤택하게 해 준다.
그래서 우리, 축제 한 번 가보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