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삶, 레이브(rave), oasis.
주경야독(晝耕夜讀). 1년 전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
내일 아침 6시 50분까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나와. 너한테 안전화 줄 거고
서류 작성해야 되니까 늦지 말고.
야. 너, 너, 너, 너, 너는 뭔 일을 그따위로 하냐? 이, 이, 이, 이, 인마 이거 아, 아, 아, 아, 아, 안 되겠네. 니 일한 지가 한 달이 넘어가는데 내 말을 안 들어!
사건은 10월 초. 유독 말더듬는게 심하고 발음조차 어눌하며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일본어와 한국어의 혼용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반장의 외침이었다. 사거리 맨홀을 재정비한답시고 도로를 싹 갈아엎고 교통이 혼잡한 출근 시간. 신경이 바짝 서고 살면서 이렇게 집중한 적도 없으리라. 여느 때처럼 땅 밑에서 더러운 오수관의 해체와 재연결반복하고 콘크리트로 보호공을 치던 도중 반장의 묵직한 호출로 나는 지상으로 나갔다. 땅을 세게 두들기는 기계, 일명 '콤팩터'로 불리는 기계를 다루라는 지시였다. 기계의 떨림과 소음이 예상을 아득히 넘는 크기였기에 주변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좀 우려스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하라면 해야 하는 게 내 지금의 위치였다. 도로의 변두리를 따라 기계로 땅을 두들기던 중 반장의 폭언이 내 고막을 세게 때렸다.
모든 사람들이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고 특히, 본인의 직속 상급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하급자의 심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은 달랐다. 그 어떤 인정도, 좋은 말도, 웃음도 없었다. 좀 더 효율적인 방식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방식으로 이윽고 다시 진행하게 한다. 그래도 참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도 그렇게 일하다 보면 저분에게 인정받고 언젠간 웃으면서 약주 한잔 같이 마시지 않을까. 그런 기대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기대였을 뿐. 열심히 뛰어다녀도, 사비를 털어 참을 사 와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해도, 심지어 다른 인부들은 "젊은 사람이 참 힘도 좋고 능력도 좋아."라며 칭찬일색을 해도, 그 사람은 되려 화냈다.
뭘 하기가 싫어졌다. 그냥 무시하라는 장비 기사분들의 덕담에도 나는 무한한 회의감이 몰려오고 열정이 없어졌다. 그냥 그 사람과 엮이기가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나를 마지못해 끌고 다닌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내게 일갈을 넣으며 지금까지의 내 수고와 노력을 멸시하는 발언을 한다. 이내 컴팩터를 껐다. 연장을 땅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 마디를 조용히 읊조린다.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딱 이 말이었다. 이윽고 가슴팍을 치는 두 손. 이후 안전모를 강하게 내려치는 손아귀. 반장이 내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70이 넘은 어른의 힘이 얼마나 강하겠나면서 무시하지만 그간의 설움이 북받쳤을까.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울화가 치민 나의 윽박지름이 반장을 향해 지르고 있었다. 거구의 남성과 70대 노인의 언쟁이 남들이 보기엔 웃기겠지만 내겐 그 행위는 일종의 게워냄이자 한풀이였다. 이내 삼촌과 감리가 우리를 중재했고 그날은 조기 퇴근을 했다. 퇴근길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반장의 봉고차는 떠난 지 오래고 분노 섞인 한숨만을 푹푹 쉬며 현장을 뒤로하고 집에 갔다.
이런 일이 있는 걸 아는 텔레파시라도 있는 걸까. 오늘따라 유독 세게 울리는 전화벨. 수화기에 적힌 이름은 매일 보는 이름이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 일은 어떻게 되는지. 안 다쳤는지. 하루 힘내고 집에서 보자는 그런 말. 늘 듣는 말이지만 울분을 토해낸 빈 속에 열을 가하니 아직도 식지 않은 걸까. 뜨거운 눈물과 함께 울분을 호소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이쁨 받기 위해 일했는데 돌아오는 건 모진 소리와 폭력이었다고. 정말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고. 25살이 아닌 25개월 정도 지난 아이의 생떼와 같은 응석이었다.
"그런 감정은 일시적이다. 즐거웠던 날을 회상하며 이겨내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야."
가장 최근에 즐거웠던 날. 흙과 오물을 뒤집어쓴 채 걷던 나는 인도의 가장자리에 잠시 걸터앉았다. 회상해 본다. 그해 8월의 잠실. 날도 덥고 고향 친구를 음악 축제에 데려가는 첫 경험. 그날은 수많은 음악 축제를 갔던 나였지만 처음으로 현장에서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Don't look back in anger/i heard you say/at least not today
8월의 페스티벌은 내가 갔던 어떤 곳보다 인상 깊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침체된 문화생활을 재개한 처음이기도 했고, 뜻 맞는 고향 친구와 같이 가기도 했고, 어떤 곳보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친해진 그런 곳이었다. 자연스레 형성되는 음악에 미치는 분위기.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레이브(rave)'라고 얘기한다. 광적이고, 남들과 부대끼는 게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레 미치는 분위기. 전자 음악 장르의 기원과 함께 파생된 문화이다. 그러면서 다 같이 흥분하고 격앙되는 기조를 이룬다.
국내에서 전자음악 관련 행사 주최사 중에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걸로 나름 정평이 나있는 'bepc tangent'사의 축제는 처음이라 어떻게 운영을 하는지 궁금한 면도 이번 축제를 오게 된 계기에 포함된다. 집단 광기의 분위기는 10시가 되면 이내 싹 가라앉는다. 꿈같았던 쾌락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잠실에 울려 퍼지는 오아시스의 노래. 우스갯소리로 영국인들의 제2의 애국가로 불리는 그 노래. 'don't look back in anger'가 잔잔하게 퍼졌다.
사실 그 노래를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밴드도 그냥 친구들과 음악 얘기하다가 들은 정도로 스쳐 보냈다. 하지만 느꼈던 건 언젠가 길 가다가 스쳐 들었던 그 노래는 록 음악이었는데 원곡과는 달리 라이브에서 어쿠스틱 한 느낌으로 편곡한 뒤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 음원인 듯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누그러뜨리고 이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알리듯 잔잔히 울리는 음악. 그 안에서 웃고 껴안으며 사진 찍는 관중들. 옆에서 친구는 이런 문화를 접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웃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울고 있다. 화난 눈물이 아닌, 환희에 사로잡힌, 감동이 벅차올라 흐르는, 그런 눈물.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3일간 광기 속에서 뭔가에 속박되지 않은 꿈같은 하루를 보내다가 이제 다시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면서 잠실을 등지고 다시 현실로 가는 모습들. 이 문화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 지 이제 6년이지만 그 축제가 라인업이 어떻든 장소가 어떻든 뭔 상관인가. 서사가 갖춰진 채 마지막에 흐르는 오아시스의 음악과 광기의 젖은 모습이 아닌 '그리움'과 '환희'에 젖은 채 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내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그렇게 하체의 힘이 다 풀린 채 걷는 동안은 불편했지만 내심 편안한 기분으로 친구와 다음 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집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금 중천에 뜬 해를 마주하며 앉은 나는 전화기를 꺼내 그날 마지막에 찍은 사진을 보며 유튜브에 그 노래를 검색한 후 감상하며 잠시 추억에 잠겨본다.
흙투성이에 악취가 진동하는 모습으로 태양빛에 익어버린 내 모습. 열이 있는 대로 받아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늘 그런 일을 겪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이겨내게 해 준 건 즐거웠던 단 하나의 기억들이 무너지지 않게 막아준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다시 현장을 내려다본다.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차 타고 시원하게 욕 한 바가지 하러 오겠구나 싶은 내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악취 나는 나를 토닥이며 얘기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오늘은 들어가서 쉬라고.
이제야 그들이 왜 끝나면 웃어 보이는지 알 법도 했다. 그들도 화가 난다. 답답하고 왜 이렇게 사람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만을 하는지와 같은 실망에서 우러나오는 짜증. 그래도 끝나면 그 감정은 '순간'이자 '찰나'인 셈이다. 그런 감정을 계속 끌고 갈 필요는 없다.
기존에 있던 반장이 떠났다. 팀은 이제 다른 반장이 이끌어갔고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팀의 반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짜증도 나고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듣고 마찰도 있는 건 여느 때나 똑같다. 달라진 거라면 더 이상 그런 불쾌함을 끌고 가지 않고 퇴근하면 풀어낸다는 것. 그들의 노래에서도 얘기하지 않는가. 화난 채로 돌아보지 말자고. 네 마음을 알겠으니 적어도 오늘은 그러지 말자고. 다만, 오늘만 그러지 않는 게 아닌, 침대 위 이불을 개는 작은 혁명을 매일 해내는 것처럼, 그런 삶과 하루, 그리고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행함에 있어 '잠깐'이 아닌 '항상'해나가기를.
그렇게 나의 막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격려 속에 마무리지었다. 22년 8월부터 23년 1월까지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