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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환 Jun 20. 2023

화난 채로 지난날을 돌아보지 말기를.

개의 삶, 레이브(rave), oasis.


 주경야독(晝耕夜讀). 1년 전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

 김승옥 작가의 소설처럼 안개가 짙게 드리운 어떤 지역처럼 내 미래가 그렇게 안 보이지만은 않은 거 같았다. 공부를 썩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을지라도, 교육에 대한 마음속의 동경과 '나도 한 번 교육에 작은 보탬이라도 이바지하고 싶다.'라는 갈망. 그 하나면 충분했다. 휴학을 하고 준비를 차츰차츰 하다 보니 앞이 보인다. 목적지가 보인다. 길이 보인다. 나는 교육공무원이 될 거라고 목표를 잡았다. 뭔가 될 거 같았다. 하지만 이건 단지 가짜 '무진'이었을 뿐이다.


 고르게 잘 정돈된 지식을 나열해 놓은 평야도, 양식장도 없다. 적지도 않은 지식을 잘 써먹는 방법을 모르는 지금의 내 모습.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진정한 '무진'의 실체였던 것이다. 21살의 내가 무작정 펜을 잡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조직에 속하면서 우울함을 떨쳐내는 '소속감'을 회복하고자 했던 노력의 처음이자 회복의 장이었다. 그러나 25살의 나는 계획적으로 펜을 잡고 상호 간 얼굴도 모르는 거대한 집단 속에 속하면서 '장수생'이라는 우울의 늪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처절함'을 다투는 장이었다.


 준비 기간은 6개월이었다. 연초부터 펜을 잡았고 시험이 6월이니 딱 반년을 채운 셈이다. 보란 듯이 불합격. 다음 시험까지는 1년이 남아있다. 하지만 주머니를 채워야 공부를 이어나갈 수 있다. 전역을 하고 나선 스스로 돈벌이를 했다. 올해는 어떻게 벌어야 할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해볼까. 단기간에 많이 벌거면 막노동을 다시 해볼까.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을 때 뭔가 보인다. 집 앞에는 몇 년 전부터 앞산의 경치를 가로막으면서 높이 솟아오르는 콘크리트 산 몇 십 개가 굉음을 내며 솟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매미소리와 트럭의 후진 사이렌 소리가 곁들여진 여름이 이번에도 나를 찾아왔다.


 막노동은 20살 여름부터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지역의 잔뼈가 굵은 건설소장 삼촌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것도 한 몫했고, 친삼촌이 무엇보다 지역 토목회사에서 꽤 입지가 두터웠기에 매 여름마다 도움을 받곤 했다. 콘크리트 평탄화 작업인 '나라시'는 몇 년을 해도 좋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싫어했지만 그 밖에 잡일은 건설 분야의 어르신들에게 '걸물'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긴 했다. 조그만 동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설들을 보노라면, 지금보다 젊었던 열정의 산물들이 나를 바라봐주곤 한다. 그러나 이번엔 뭔가 다르다.


내일 아침 6시 50분까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나와. 너한테 안전화 줄 거고
서류 작성해야 되니까 늦지 말고.


 28층 신축 아파트의 부대토목 시설을 정비한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매년 여름마다 단순히 도로와 인도를 정비하던 내겐 새로웠고 단순히 듣기만 해도 그 규모가 꽤 컸다.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내 삼촌도 이번 작업은 동료들과 같이 혀를 내두른 채 일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일개 참새 같은 내가 봉황들의 이야기를 어찌 이해하고 헤아리겠는가. 갑들이 지시하면 을은 철저하게 하는 거다. 그뿐이다. 이 일을 할 때마다 짧은 기간에 돈을 만지기 위해 초개(芥)와 같이 몸과 정신, 자존심을 버려왔다. 그렇게 해가 뜨고 나는 후회했다.


 물안개가 걷히면서 살벌하게 내리쬐는 태양빛. 나를 인솔해 주는 나이가 지긋한 반장. 그리고 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삼촌. 모든 게 낯설었다. 콘크리트를 비집고 태어나는 아름다운 들꽃처럼 땀으로 땅을 일구고 흙먼지 속에서 웃음꽃이라도 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나를 등졌다. 큰 실수가 아니어도, 아니 그냥 실수를 하면 살벌하게 육두문자가 바람에 날리는 모래 알갱이보다도 빠르고 강하게 내 귓가를 가격했다. 작년도 힘들었지만 이렇게 살벌하진 않았었는데.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는 건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경력 좀 쌓은 '막내'일뿐인데.


 퇴근 시간에는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욕설과 짜증은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지고 나라시 작업에서야 그 절정을 찍는다. 세상 살면서 들어본 적 없는 저급한 말로 뭉친 칼. 그런 칼 수십 개가 나를 꽂아 튀어 오르게 하는 통아저씨처럼 만든다. 하지만 그것과 다른 점은 '돈'이라는 물질이 튀어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을 뿐. 작업하는 동안 그렇게 수위 높은 욕을 해가면서 갈고리질을 하다가도 30분 정도 지나면 마무리 작업을 하고 퇴근 준비를 하면 그날의 모든 토목 작업은 종료가 된다. 웃으면서 잘 가라고 하는 반장과 삼촌의 모습을 1달 정도 지켜보고 있는데 참 이질적이었다. 끓는 콘크리트보다도 뜨겁고 아스팔트보다도 질기고 꾸덕한 타인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가 언제 있었냐는 듯 이내 사라지고 웃으며 마무리를 짓는 게 참 이상하기 그지없다. 이런 현장의 분위기를 나는 처음 겪어봐서 그런가 싶었다.

 


야. 너, 너, 너, 너, 너는 뭔 일을 그따위로 하냐? 이, 이, 이, 이, 인마 이거 아, 아, 아, 아, 아, 안 되겠네. 니 일한 지가 한 달이 넘어가는데 내 말을 안 들어!

 사건은 10월 초. 유독 말더듬는게 심하고 발음조차 어눌하며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일본어와 한국어의 혼용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 반장의 외침이었다. 사거리 맨홀을 재정비한답시고 도로를 싹 갈아엎고 교통이 혼잡한 출근 시간. 신경이 바짝 서고 살면서 이렇게 집중한 적도 없으리라. 여느 때처럼 땅 밑에서 더러운 오수관의 해체와 재연결반복하고 콘크리트로 보호공을 치던 도중 반장의 묵직한 호출로 나는 지상으로 나갔다. 땅을 세게 두들기는 기계, 일명 '콤팩터'로 불리는 기계를 다루라는 지시였다. 기계의 떨림과 소음이 예상을 아득히 넘는 크기였기에 주변 소리를 못 들을까 봐 좀 우려스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하라면 해야 하는 게 내 지금의 위치였다. 도로의 변두리를 따라 기계로 땅을 두들기던 중 반장의 폭언이 내 고막을 세게 때렸다.


 모든 사람들이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고 특히, 본인의 직속 상급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하급자의 심리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은 달랐다. 그 어떤 인정도, 좋은 말도, 웃음도 없었다. 좀 더 효율적인 방식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면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방식으로 이윽고 다시 진행하게 한다. 그래도 참는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도 그렇게 일하다 보면 저분에게 인정받고 언젠간 웃으면서 약주 한잔 같이 마시지 않을까. 그런 기대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기대였을 뿐. 열심히 뛰어다녀도, 사비를 털어 참을 사 와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을 해도, 심지어 다른 인부들은 "젊은 사람이 참 힘도 좋고 능력도 좋아."라며 칭찬일색을 해도, 그 사람은 되려 화냈다. 


 뭘 하기가 싫어졌다. 그냥 무시하라는 장비 기사분들의 덕담에도 나는 무한한 회의감이 몰려오고 열정이 없어졌다. 그냥 그 사람과 엮이기가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도 나를 마지못해 끌고 다닌 느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내게 일갈을 넣으며 지금까지의 내 수고와 노력을 멸시하는 발언을 한다. 이내 컴팩터를 껐다. 연장을 땅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 마디를 조용히 읊조린다.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딱 이 말이었다. 이윽고 가슴팍을 치는 두 손. 이후 안전모를 강하게 내려치는 손아귀. 반장이 내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다. 70이 넘은 어른의 힘이 얼마나 강하겠나면서 무시하지만 그간의 설움이 북받쳤을까.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울화가 치민 나의 윽박지름이 반장을 향해 지르고 있었다. 거구의 남성과 70대 노인의 언쟁이 남들이 보기엔 웃기겠지만 내겐 그 행위는 일종의 게워냄이자 한풀이였다. 이내 삼촌과 감리가 우리를 중재했고 그날은 조기 퇴근을 했다. 퇴근길을 오르며 뒤돌아보니 반장의 봉고차는 떠난 지 오래고 분노 섞인 한숨만을 푹푹 쉬며 현장을 뒤로하고 집에 갔다.


 이런 일이 있는 걸 아는 텔레파시라도 있는 걸까. 오늘따라 유독 세게 울리는 전화벨. 수화기에 적힌 이름은 매일 보는 이름이다. 밥은 먹었는지. 오늘 일은 어떻게 되는지. 안 다쳤는지. 하루 힘내고 집에서 보자는 그런 말. 늘 듣는 말이지만 울분을 토해낸 빈 속에 열을 가하니 아직도 식지 않은 걸까. 뜨거운 눈물과 함께 울분을 호소했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이쁨 받기 위해 일했는데 돌아오는 건 모진 소리와 폭력이었다고. 정말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고. 25살이 아닌 25개월 정도 지난 아이의 생떼와 같은 응석이었다.


"그런 감정은 일시적이다. 즐거웠던 날을 회상하며 이겨내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야."


 가장 최근에 즐거웠던 날. 흙과 오물을 뒤집어쓴 채 걷던 나는 인도의 가장자리에 잠시 걸터앉았다. 회상해 본다. 그해 8월의 잠실. 날도 덥고 고향 친구를 음악 축제에 데려가는 첫 경험. 그날은 수많은 음악 축제를 갔던 나였지만 처음으로 현장에서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Don't look back in anger/i heard you say/at least not today


 8월의 페스티벌은 내가 갔던 어떤 곳보다 인상 깊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침체된 문화생활을 재개한 처음이기도 했고, 뜻 맞는 고향 친구와 같이 가기도 했고, 어떤 곳보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친해진 그런 곳이었다. 자연스레 형성되는 음악에 미치는 분위기. 우리는 이런 분위기를 '레이브(rave)'라고 얘기한다. 광적이고, 남들과 부대끼는 게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레 미치는 분위기. 전자 음악 장르의 기원과 함께 파생된 문화이다. 그러면서 다 같이 흥분하고 격앙되는 기조를 이룬다.


 국내에서 전자음악 관련 행사 주최사 중에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걸로 나름 정평이 나있는 'bepc tangent'사의 축제는 처음이라 어떻게 운영을 하는지 궁금한 면도 이번 축제를 오게 된 계기에 포함된다. 집단 광기의 분위기는 10시가 되면 이내 싹 가라앉는다. 꿈같았던 쾌락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러면서 잠실에 울려 퍼지는 오아시스의 노래. 우스갯소리로 영국인들의 제2의 애국가로 불리는 그 노래. 'don't look back in anger'가 잔잔하게 퍼졌다.


 사실 그 노래를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밴드도 그냥 친구들과 음악 얘기하다가 들은 정도로 스쳐 보냈다. 하지만 느꼈던 건 언젠가 길 가다가 스쳐 들었던 그 노래는 록 음악이었는데 원곡과는 달리 라이브에서 어쿠스틱 한 느낌으로 편곡한 뒤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 음원인 듯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누그러뜨리고 이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알리듯 잔잔히 울리는 음악. 그 안에서 웃고 껴안으며 사진 찍는 관중들. 옆에서 친구는 이런 문화를 접하게 해 줘서 고맙다고 웃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울고 있다. 화난 눈물이 아닌, 환희에 사로잡힌, 감동이 벅차올라 흐르는, 그런 눈물.


 얼마나 아름다운가. 한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3일간 광기 속에서 뭔가에 속박되지 않은 꿈같은 하루를 보내다가 이제 다시 기약 없는 만남을 기다리면서 잠실을 등지고 다시 현실로 가는 모습들. 이 문화를 사랑하고 관심을 가진 지 이제 6년이지만 그 축제가 라인업이 어떻든 장소가 어떻든 뭔 상관인가. 서사가 갖춰진 채 마지막에 흐르는 오아시스의 음악과 광기의 젖은 모습이 아닌 '그리움'과 '환희'에 젖은 채 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내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그렇게 하체의 힘이 다 풀린 채 걷는 동안은 불편했지만 내심 편안한 기분으로 친구와 다음 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집으로 왔다.


 그리고 다시금 중천에 뜬 해를 마주하며 앉은 나는 전화기를 꺼내 그날 마지막에 찍은 사진을 보며 유튜브에 그 노래를 검색한 후 감상하며 잠시 추억에 잠겨본다.


 흙투성이에 악취가 진동하는 모습으로 태양빛에 익어버린 내 모습. 열이 있는 대로 받아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늘 그런 일을 겪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이겨내게 해 준 건 즐거웠던 단 하나의 기억들이 무너지지 않게 막아준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다시 현장을 내려다본다.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차 타고 시원하게 욕 한 바가지 하러 오겠구나 싶은 내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악취 나는 나를 토닥이며 얘기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거라고. 오늘은 들어가서 쉬라고.


 이제야 그들이 왜 끝나면 웃어 보이는지 알 법도 했다. 그들도 화가 난다. 답답하고 왜 이렇게 사람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만을 하는지와 같은 실망에서 우러나오는 짜증. 그래도 끝나면 그 감정은 '순간'이자 '찰나'인 셈이다. 그런 감정을 계속 끌고 갈 필요는 없다.


 기존에 있던 반장이 떠났다. 팀은 이제 다른 반장이 이끌어갔고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팀의 반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짜증도 나고 안 좋은 소리도 많이 듣고 마찰도 있는 건 여느 때나 똑같다. 달라진 거라면 더 이상 그런 불쾌함을 끌고 가지 않고 퇴근하면 풀어낸다는 것. 그들의 노래에서도 얘기하지 않는가. 화난 채로 돌아보지 말자고. 네 마음을 알겠으니 적어도 오늘은 그러지 말자고. 다만, 오늘만 그러지 않는 게 아닌, 침대 위 이불을 개는 작은 혁명을 매일 해내는 것처럼, 그런 삶과 하루, 그리고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행함에 있어 '잠깐'이 아닌 '항상'해나가기를.


 그렇게 나의 막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격려 속에 마무리지었다. 22년 8월부터 23년 1월까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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