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후 3시. 고민에 빠지는 시간.
오늘 저녁반찬은 또 뭘 해 먹어야 돼?
살림을 하는 주부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고민이자 평생 해결 안 될 문제다.
지인과의 대화 중에 반찬얘기라도 나오면 본능적으로 귀가 쫑긋 서고, 다른 집은
요즘 무슨 반찬을 해 먹는지 커닝 좀 해볼까 하는 마음이 발동한다.
그 집 밥상 얘기를 들으면 말만 들어도 참신하고 입맛이 돈다.
맞아! 그런 반찬도 있었지, 고등어 말고 가자미라는 생선도 있었어.
매일 했던 요리만 돌려 막기 하다 보니,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식재료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망각해 버렸다.
먹는 거에 둔한 내가 해주는 재미없는 음식을 군소리 않고 먹어주던 우리 식구들은
얼마나 지겨웠을까?
그러다가 운 좋게 어디서 김치든 새로운 반찬이라도 받게 되면 "야호! 이걸로 또 한 끼가
해결됐다"며 쓰지 않은 외식 쿠폰을 받은 것처럼 기뻐한다.
집에서 못 보던 반찬(내가 안 해주던 반찬)을 마주하게 된 가족들은 맛있다며 환호하고,
"엄마도 이런 반찬 좀 해봐요~"라며 그동안 쌓아두었던 반찬투정도 은근히 내비친다.
항상 그날이 그날이던 내 요리들에 반성하며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리라
다짐해 보지만 다시 마트에 나가면 이내 익숙한 재료들에 손이 가고 이미 외워버린
레시피대로 음식이 만들어질 뿐이다.
그 정도 머리 쓰는 일에도 이렇게 귀찮아한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머리도 좋다고 하더니, 머리를 안 써 버릇해서인지 새로운 레시피를
익히는 것도 벅찬 일이 되는 것 같다.
나는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 집안의 끼니를 주로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가족들에게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닐 것이다. 특히 다양한 음식들을 실생활과 매스컴을 통해 끝없이 접할 수 있는,
새로운 음식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너무나 평범한 반찬들에는 흥미가 생길 리 없다.
나는 대충 간단하게 한 끼 때워도 불만이 없지만, 좀 더 맛깔난 음식을 다양하게 맛보고 싶어
할지도 모를 가족을 위해서 색다르고 특별한 요리도 가끔은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느껴지고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내가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들까지 부실하게 먹일 수는 없고,
건강한 먹거리를 잘 챙겨주기 위해서 나도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지금은 매일 먹는 음식이라도 어떻게 하면 좀 더 맛있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비싸고 좋은 식재료 사서 잘해 먹으면 해결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비싼 재료 사다가
내 허접한 솜씨로 평범한 음식밖에 더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고, 고급음식을 자주 먹어도
어쩐지 별 볼일 없는 내 일상과 같은 담백하고 소박한 반찬이 곧 그리워질 것 같기도 하다.
음식욕심이 별로 없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가족들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특별한 스킬 없이 집에 있는 재료로 뚝딱 만들어 주는 <김치찜>을 한동안 안 해주면
모두가 그리워하곤 하니까.
제일 맛있는 건 남이 해준 음식이라는데 내가 만든 음식이 아직 그런대로 먹을 만 한걸 보면,
나는 집에서 요리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훌륭한 솜씨는 아니라도 내 입맛대로 만들어서 차려먹는 집밥이 아직은 제일 맛있게 느껴진다.
이제부터 나올 음식들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생뚱맞게 튀어나온 메뉴가 아니라 그동안 수없이
만들어서 밥상에 올리고 가족들이 물리도록 먹어본 음식들이다.
사실 이 기회에 특별한 음식 만들기에 도전해 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지금 얼떨결에 만들었다고
해서 자주 해 먹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이벤트 성격이 다분한 “특별식”보다는 아직도 어설픈(?)
주부 9단이 눈감고도 해낼 수 있는 음식들을 선보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과정이 될 것 같다.
20년의 주부경력을 가위 바위 보로 따낸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음식들로 오랜 세월 수많은
밥상들을 채워왔는지 솔직히 나도 궁금해진다.
변함없이 먹고살아야 하는 음식들을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즐기려면 식재료 본연의 퀄리티를
최대한 업그레이드시키고 제대로 된 조리법으로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또한 메뉴의 순환 사이클을 넓게 잡아 같은 음식이라도 가끔씩 먹도록 해서 질리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먹어야 하니까 좀 더 잘해 먹고살기로 했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음식이 먹고 싶다면 괜히 힘 빼지 말고 그냥 나가서 사 먹었으면 한다.
특별한 날에는 나도 그만한 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창의력 없고 복잡한 레시피도 외우지 못하는 나여서 삶의 모티브대로 요리도 미니멀하게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들기 힘든 과정이 없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라서 계속하게 되는 우리 집밥!
매일 먹는 음식이라도 대충 차려먹고 싶지는 않으니까 평범한 흰쌀밥을 올려도
단정한 그릇에 살포시 담아 줄게.
화려한 밥상이 아니라도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정성”이
들어간다면 가능해진다.
다른 건 몰라도 정성 들여 밥상 차리는 거 하나만큼은 미슐랭 쓰리스타감이니까,
내 밥상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최고로 대접받는 느낌을 갖게 해 주겠다.
띠롱~
그때 딸아이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교 중이던 딸은 제일 좋아하는 연어초밥이 먹고 싶으니 저녁에 외식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아이는 아직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이 더 좋은가보다.
그런데 어쩌지? 엄마가 저녁메뉴를 벌써 정했단다.
오늘은 집밥 먹으렴~
새롭고 특별한 요리냐고? 아니~
네가 항상 봐왔고 먹어본 음식이야. 너는 아직도 엄마를 모르니?
엄마는 고리타분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