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좋은 거 먹이고 싶을 때

돼지고기 묵은지찜

by 아이스블루


"어머니가 끓여내던 투박한 된장찌개 냄새는, 그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우리 집을

집답게 만들어주던 유일한 평화였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년작) 중에서-




회사 그만둘 날을 받아놓고, 앞으로 당분간은 쉴 예정인데도

오늘은 휴무라고 집안일은 오후로 미룬 채, 피로 푼다고 뒹굴뒹굴~

그때 갑자기 학교에 있던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있을 시간에 오는 아이들의 전화는 어쩐지 불길하다. 좋은 일일 리 없기 때문이다.

“엄마~ 나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조퇴해도 돼?”

그럼 그렇지..

요즘 기말고사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학원 보충에 무리를 했는지 딸아이는 몸살이 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 함께 집에 오는 길~

마트 들러 딸아이가 먹고 싶다는 거 몇 가지 고르며 오늘 저녁 반찬을 새삼 걱정했다.

20년 차 주부가 말이다.


집에서 살림만 할 때는 이것저것 반찬도 잘해 먹이고

아이들 간식으로 쿠키에 애플파이까지 구워주던 나였는데, 돈 번다고 바깥일 하면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대충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가족들 먹거리를 소홀히 생각했는지 엄마로서 후회가 밀려온다.

이제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감기라도 걸릴라치면 내가 잘 못해먹여서 그런가? 하는 죄책감마저 드니

더 큰일 나기 전에 정신 차려야겠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가족 몸보신을 시켜줄까 한다.

특히 가족모두 좋아해서 "이건 주기적으로 먹어줘야 해"라는 찬사가 꼬리표처럼 붙은

<돼지고기 묵은지찜>을 해주기로 했다.




간단하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내가 하는 일이 없는 레시피다.




요리법은 모두 알다시피 간단하다.

냄비에 묵은지랑 돼지고기 넣고 양파랑 대파를 썰어 넣는다.

갖은양념과 된장도 조금, 물도 넣은 양념장을 잘 섞어 고기 위에 뿌려주고 뚜껑 닫고 1시간 동안

뭉근~히 끓이기만 하면 된다.


내가 들인 수고로움에 비하면 결과물이 너무 훌륭해서 별로 들어간 것도 없는데 이렇게 맛있는 건

순전히 질 좋은 무쇠솥 때문이라며 남편에게 냄비 자랑을 하면서도, 내 요리 실력을 은근히 끼워 넣기도

했었지.

그래! 비싸면 어떻고 무거우면 어떠랴~ 맛난 음식 자주자주 해 먹으며 비싼 냄비 값 뽕 뽑을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써주마.

이걸로라도 내 허접한 요리 실력을 업그레이드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실용적이고 성능 좋다고 사들인 갖가지 주방용품들 그냥 놀리지 않고 나와 가족들 거둬 먹이는 데에

열심히 써주기로 했다.


한 시간 동안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직무유기를 반성하다 보니 김치찜은 멋진 비주얼로 변모해 있었다.

이것이 진정한 미라클이로구나!

이렇게 간단한 요리 몇 가지 돌아가면서 하는 것도 귀찮다는 이유로 배달음식과 인스턴트에 너무 쉽게

마음을 열어버렸다니...


앞으로도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일이 버겁게 느끼고 미루게 되는 순간들을 맞게 될 것이다.

어떻게 매일 집안일을 열심히 할 수 있겠나.

가끔 빨래거리가 쌓이고 청소는 못하더라도, 먹는 거만큼은 건강하고 풍성한 재료로 잘해 먹기로 했다.

그러다 별다른 양념 없이도 맛있다는 가족들의 칭찬을 듣게 될 때,

그것이 비싼 냄비나 화려한 레시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엄마의 손맛 덕분이라는 걸 몰라줘도 별로 섭섭할 것 같지 않다.




가족의 마음까지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자태다. 이제 먹어볼까?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