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볶음밥
- 오가와 이토 '달팽이 식당'(2008년작) 중에서
내게는 반찬을 준비하면서 위기상황이 닥치면 생각나는 요리 치트키(Cheat key)가 있다.
꼭 필요한 순간에 꺼내드는 비장의 카드 말이다.
다른 일이 바빠서든 게으름을 피우다가 음식준비가 늦어졌든 반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지 못했거나
여러 사람의 입맛을 단 번에(특히 아이들) 만족시키고 싶을 때 떠오르는 메뉴는 바로 김치볶음밥이다.
아마 나뿐이 아니라 집집마다 아주 손쉽게 한 끼를 맛있게 해결할 수 있는 메뉴일 것이다.
김치 외에 들어가는 재료도 각자가 마음대로 넣으면 되고 레시피가 따로 정해져 있다면 그게 더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만드는데 부담이 없고 쉬운 요리이다.
김치가 없다면 만들 수 없는 메뉴이고 특별히 들어가는 재료는 없어도, 집밥내공이 탄탄해야 갖출 수 있는 '맛있는 김치'가 주인공이라서 아주 귀한 음식이기도 하다.
잘 익은 엄마표 집김치가 없어서 마트에서 사 온 덜 익은 김치로 만든다면 그 특유의 얼큰하고 감칠맛 나는
김치볶음밥은 맛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래서 아무리 다른 반찬이 없어도 김장김치만 쟁여놓는다면 마음이 든든한 모양이다.
김치가 있으면 열반찬이 부럽지 않지만 그 똑똑한 김치 하나가 없다면 아쉬운 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이것저것 벌여놓은 일은 많고 이상하게 처리할 일이 한꺼번에 생기다 보니 마땅한 메뉴를 오후 늦게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방학중이라 애들도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날이고, 남편도 재택근무하는 주간이라
나 혼자서 저녁을 때울 때처럼 손쉽게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감했다.
이럴 때마다 한도가 정해져 있는 '외식권'을 함부로 쓸 수는 없고....
그렇지만 나에게는 <집밥 프리패스>가 있다.
입맛 까다로운 식구들의 취향을 일일이 감안하지 않고 그냥 만들어놔도 일단은 군소리 없이 먹어주는
메뉴말이다.
맛있게 익어서 찌개를 해도, 찜을 해도 맛 좋은 신김치가 전면에 나서는 김치볶음밥은 재료만 잘게
다져놓으면 거의 다 만든 셈이다.
들어가는 재료를 일일이 다지고 준비를 할 때는 약간의 참을성이 필요하지만, 볶음의 시간이 오고
다져놓은 것들을 차례로, 이내 모두 다 같이 볶아낼 때는 일종의 희열까지도 느껴진다.
이것으로 한 끼가 해결된다!
갖은 재료가 한대 어우러지고 밥이 먹음직스럽게 익을 때까지 한동안 밥을 볶는 것은 팔이 아픈 일이지만,
고소한 김치볶음밥의 향이 솔솔 나기 시작할 때 식구들의 환호성이 터지면 '오늘도 성공이구나~' 하며
안심한다.
하긴 이거 만들어서 젓가락 깨작대는 건 못 봤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 녀석은 육류, 또 하나는 생선, 한식과 양식... 하나부터 열까지 입맛이 달라서 식구가 함께 저녁을 먹는 날 메뉴를 정할 때면 머리를 잘 써야 하기 때문에, 하나라도 의견일치를 봐주는 음식이 있다면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완성된 볶음밥에 모차렐라 치즈를 넣거나 계란프라이를 살짝 얹어주면 영양적인 면에서나 비주얼면에서도 훨씬 고급스러운 음식이 된다.
김뽁은(아이들이 김치볶음밥을 부르는 애칭이다) 너무 자주 남발하지만 않는다면 식탁이 빈곤할 때나
위급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프리패스로 통하리라.
이 정도면 우리 집에서 이제 김치볶음밥은 냉장고 속 자투리 반찬을 고추장과 함께 섞어 볶아먹는 <냉장고
정리용 메뉴>가 아닌 게 됐다.
"반찬 해 먹을 것도 없는데 오늘은 그냥 김치 넣고 볶음밥이나 해 먹을까?"
No No!!
정말로 필요할 때를 위해서 아껴두련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식탁을 메워줄 반찬은 얼마든지 있다.
해먹을 차례가 돌아온 우리 집 시그니쳐 반찬이던지 아니면 인터넷 검색도 좀 해가며 찾아보면
한두 가지는 나올 것이다.
그러다가 정말 내 컨디션이 바닥을 치고 외식하기도 곤란할 때 집밥을 해 먹어야 한다면, 그때를 위해서
가족들에게 언제 만들어 내놓아도 환호를 받을 수 있는 프리패스 메뉴 하나쯤은 꼭 남겨놓고 싶다.
특별한 거 안 했는데 잘 먹었다고 칭찬을 받는다. 가족 모두가 맛있다고 환호한다.
만들기 쉽고 많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만들어 놓으면 근사한 요리 몇 가지는 있으며, 잘만 활용하면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의 식사를 생각해 내느라 힘겨운데 가끔은 별거한 것 없이 들을 수 있는
공짜 커피 같은 칭찬도 필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