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와인파티
-카렌 블릭센(필명: 이사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1950년작) 중에서-
가족기념일이나 특별히 축하할 일이 있을 때면 빠지지 않는 메뉴가 있으니 바로 고기다.
그것도 소고기!
돼지삼겹살도 훌륭한 음식이지만 이름표가 달려있는 기념일에 조촐하게 가족과 파티분위기를 낼 때에는
아무래도 소고기 쪽이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이것도 내가 요리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게 없어서겠지?
수산물, 돼지고기, 오리고기, 닭고기, 파스타, 케이크, 등...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음식이 있는데
특별한 날 먹을 음식이 어떻게 소고기뿐이겠냐고.
숨겨둔 내 창의력을 이번생에는 발휘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연말이 아닌가?
일 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생활해 온 가족들의 노고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 그 한 가지만으로도 집콕 파티를 열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소고기는 등심과 살치살로 준비하고 가니쉬로는 그냥 집에 있는 파프리카를 썰어놓아 본다.
요리가 취미는 아니더라도 갖추어야 할 재료를 빠짐없이 준비하고 음식의 비주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가 다소 빈약하게 재료준비를 한 이유는 급하게 차려진 상이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장을 보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지인으로부터 받은 고기를 오늘 당장 먹어야 했기에 계획에도
없던 와인파티를 열게 생겼다.
이렇게 빛깔도 고운 소고기를 냉동시킬 수는 없고, 야채는 아쉬운 대로 파프리카가 있으니 핑계김에
상 한번 멋지게 차려보기로 했다.
기왕 고기파티 하기로 한 거 곁들이는 야채도 폼나는 거로 좀 사다가 제대로 해 먹을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공짜로 받은 음식이라면 정말 '공짜'로만 먹어보고 싶기도 하다.
이런 식재료를 받았으니 저런 것도 사서 같이 먹으면 더 맛있겠다며 항상 추가로 뭔가를 사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또 남는 재료가 생기곤 한다.
받은 음식은 하나뿐인데 겸사겸사 마트 쇼핑에 돌입하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사실 등심구이에 아스파라거스나 버섯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오늘은 받은 음식과
냉장고에 이미 있는 식재료로 한 끼 알뜰하게 때워 보련다.
2주에 한 번씩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다양한 식재료를 사다 나르던 시절에는 필요할 것 같아서 샀으나,
다 못 먹고 버린 음식도 많았고 항상 냉장고가 꽉 차있었다.
그러다가 집안 물건 정리를 하며 생활방식이 바뀌면서 대형마트 장보기를 끊고 집 앞 마트에서 필요한
만큼 조금씩 반찬거리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냉장고가 음식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면 며칠간 마트를 가지 않으며 있는 음식을 먼저 먹는다.
빈자리가 보일 때쯤 장보기 리스트를 작성하고 장바구니를 챙긴다.
자주 장을 보러 가는 것이 귀찮기도 했지만, 냉장고 속 여유 있는 빈 공간과 남아있는 식재료들의 정갈한
모습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걸 보면 이쪽이 나한테 맞는 살림 방법인가 보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하는 일이다.
먹는 일이 별로 재미없고 꽉 찬 냉장고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조금씩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는 편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멋진 음식점에서 질 좋은 고기로 저녁식사를 하고 집에 들어오면 설거지할 일도 없고 편하겠지만,
직접 고기를 구워 어울리는 그릇을 꺼내고 와인잔을 준비하는 과정이 이미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오히려 잔치분위기에는 집밥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잔뜩 어질러진 주방정리는 온전히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있어도 준비과정에서 얻는 기쁨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라 상관없다.
홀그레인 머스터드소스등의 갖가지 소스가 오늘의 빈약한 메뉴를 살렸다고 할 수 있는 고기뿐인
식탁이면 어떠랴? 맛있는 고기를 넉넉하게 구워놓고 느끼하지 않게 김치도 빠져서는 안 된다.
게다가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고급 와인도 있으니 새로 얻은 식재료는 냉장고 음식을 활용하여
아낌없이 먹기만 하면 된다.
연말파티를 연다고 수선 떠느라 주방은 엉망이 되었어도 우리 앞의 식탁만은 멋지게 완성이 되었다.
가끔은 집에서도 특별한 파티를 준비한다.
꼭 비싸고 좋은 음식이 있어야, 음식점처럼 빠짐없이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어야만 분위기 있는
상차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 음식 준비하는 과정이 즐겁고 가족들에게 멋진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조금
성가실수도 있는 일들까지도 행복한 순간으로 맞이할 수 있다.
밖에서 이렇게 고기를 먹으면 식사비가 얼마나 나올까?라는 우스운 질문을 이제 하지 않기로 했다.
단순히 고기를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었기 때문에 돈을 얼마만큼 아꼈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손수 만들어먹는 집밥에 쏟는 정성을 기껏 저렴한 재료비에 헐값으로 넘겨버리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집순이인 나에게 외식과 집밥은 어차피 비교대상이 되지 못하며 집에서 차려먹는 따뜻한 밥 한 끼에는
아껴지는 돈 이상의 값어치가 매겨진다.
1년 365일 집밥을 해 먹지는 못하지만 내 옆사람을 챙겨주는 무조건적인 행복을 느끼고 싶을 때면
집에서의 파티를 계획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