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음식을 실컷 먹고 싶을 때

갈치조림

by 아이스블루


"그녀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화이트소스를 얹은 송아지 고기 요리를 꿈꿨다. 금색 테두리가 둘러진 접시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음식을 말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1856년작) 중에서



남편의 생일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는 달리 '해산물 파'라서 남편생일상의 메뉴로 육류는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꽃게, 홍합등의 수산물, 갑각류 등이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 미역국에 쇠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은 괜히 도리에 어긋나는 일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트에 나간

길에 모시조개를 찾아보았다.


동네마트라고는 하지만 규모가 꽤 큰 곳인데도 모시조개의 양이 너무 빈약하게 담겨있었고(한팩에 10알

정도?) 생각보다 비싼 값에 화들짝 놀랐다.

모시조개가 원래 이렇게 몸값이 나가는 조개였나?

자주 먹지 못하지만 무척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해볼 생각으로 모시조개와 함께 갈치도 슬쩍 보았으나,

역시 작지만 높은 금액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과연 갈치값은 떨어질 날이 있을까? 아쉬워하며 다른 저렴한 생선을 대신 담고 말았겠지만, 1년에 한 번 오는 생일인데 비싸더라도 좋아하는 거 한번 실컷 먹게 해주고 싶었다.

"이 금액을 감수하면서 구입할 바에는 차라리 수산시장으로 가자!" 결심을 하고, 다음날 길을 나섰다.




들어갈 재료 손질이다. 갈치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흡족한 적이 있던가?




처음에는 대충 해 먹자고 하던 남편을 설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역국을 끓이면 고기만 건져내던 사람이므로 자신의 생일 미역국에 고기대신 조개가 들어간다고 하면

게임 끝이니까.

기왕 나간 김에 생물 몇 가지 담아 오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곤란할 것 같아 남편을 꼬셔서 차를

가지고 수산시장으로 갔다.(난 장롱면허를 가지고 있다)

갈치 사러 수산시장에 가자고 하니까 두말 안 하고 따라나선다.

내심 많이 먹고 싶었나 보다.


동네 마트에서 매일 뻔한 생선들만 보다가 수산시장을 가니 나까지도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해물 마니아인 남편은 어땠을까?

각종 다양한 생선과 해물들... 그에게는 말 그대로 천국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고기를 찾는 입맛에 맞추느라, 또 조금이라도 손쉬운 장보기와 재료손질을 핑계로

수산시장을 멀리해 왔기에 남편에게 행복한 장보기의 기회를 좀 더 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보이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아버릴까 봐 오늘은 갈치와 모시조개, 딸아이가 좋아하는 생연어, 이 3가지만

사겠노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건만, 통통한 오징어도 보이고 석굴도 나를 유혹하고 홍합도 눈에

띄었다.




갈치조림이 맛있어질 양념들이 한자리에 모일 시간이다.




그래~ 올 생일에는 다른 음식 아무것도 안 하고 갈치조림만 잔뜩 만들어서 실컷 먹게 해 주겠다.

비싼 가격 때문에 조금이라도 큰 것이 세일가에 나온 것은 없는지 두리번거릴 때와 달리, 딱 봐도 크고

싱싱한 녀석으로 가격 흥정도 안 하고 쿨하게 주문하고 결재를 했다.

너무 비싼걸 많이 샀나?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을 핑계로 갈치조림을 원 없이 해 먹이는 날이니까.

나 좀 멋있는데?


다행히 처음 결심한 대로 정말 갈치, 모시조개, 생연어만 넉넉하게 구입해서 오는 길에 묵직한 장바구니를 들어주는 그는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갈치와 모시조개를 손질해서 깨끗이 물로 씻고 생연어는 먹기 좋은 크기로 슬라이스를

한다. 모시조개는 소금물로 해감하고 갈치조림을 위한 야채와 양념장도 만들어 놓는다.

수산물이라서 그런지 신선할 때 빨리 손질해서 음식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특히 부지런한 손놀림이 필요한 식재료라서 게으른 내가 그동안 수산시장을 멀리해 온 솔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태 몸이 편했던 만큼 단조로운 메뉴가 질리기도 했으므로 앞으로는 조금씩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해서 음식을 해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누군가의 행복한 함성이 들리는듯하다.




무를 깔고 갈치로 덮는다. 무가 안보이긴 처음이다.




이제 너무나 귀한 갈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갈치조림, 갈치구이는 흔한 집반찬이었다.

별로 어렵지 않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맛볼 수 있는 일상적인 엄마표 반찬이었고, 귀한 줄 모르고 당연하게 호사를 누렸다.

이렇게 몸값이 뛸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많이 먹어둘걸' 하는 아쉬움이 들고, 지금 쉽게 구해서

먹는 다른 음식들도 먹을 수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려고 한다.


오늘은 재료가 신선하고 양이 넉넉하므로 곁들이는 야채나 양념에 힘을 빼도 충분히 훌륭한 음식이 완성될

것이라서 재료 손질만으로도 이미 뿌듯한 느낌이다.

맛깔난 양념이나 특별한 요리솜씨 보다 이제부터는 맛있어지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좋은 재료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마법을 걸어본다.




갈치조림이 워낙 가뭄에 콩 나듯이 해주는 메뉴이다 보니 어쩌다 생선 조림을 하면 '갈치'냐고 물어보던

아이들이 떠올랐고 마침 비싼 생선을 배짱 좋게 왕창 사 버린 내가 괜한 짓 한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진다.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니까 많이 사 오길 잘했다!

"물건값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쿨하게 산다." 이런 통 큰마음까지도 남편을 위해 준비한

생일 선물의 일부분인 셈이다.

좋아하는 거 이런저런 조건 안 따지고 기분 좋게 사주는 것이 받는 사람도 기뻐할 가장 큰 선물일 것이며, 나는 어쩌면 단순히 비싼 음식을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비싼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먹는 여유를 부리고 싶었던 건 아닐는지.

식재료를 구입할 때마다 그럴만한 내공은 아직 부족하니 최소한 1년에 4번 있는 가족의 생일만큼은 통 큰

허세를 부려보기로 했다. 한동안은 만나기 어려울 푸짐한 갈치조림을 맛있게 다 먹어 주는 것이 행복한

날을 마음껏 누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밥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리~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