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할 반찬이 없을 때

쇠고기 카레

by 아이스블루



20세기 영국의 요리사 작가이자 요리의 대모였던 "엘리자베스 데이비드"는 복잡한 기교보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간편한 요리의 가치를 설파했다.

오믈렛에 관한 이 짧은 글에는 조리 과정이 짧을수록 요리하는 사람의 피로는 줄어들고 먹는 즐거움은

더 순수해진다는 철학을 담았다고 한다.


완벽한 오믈렛은 단순함에 대한 경의이다. 그것은 불과 달걀, 그리고 약간의 인내심만

있으면 충분하다.


-엘리자베스 데이비드 '오믈렛과 와인 한 잔 (An Omelette and a Glass of Wine, 1984년작) 중에서-




뭘 해야 할까? 저녁은 해야겠는데 생각나는 반찬이 없을 때는 난감하다.

솔직히 생각나는 게 없다기보다 오늘은 레시피를 기억해 내거나,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여러 단계의 조리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버거운 날이라는 쪽이 맞을 것 같다.

나 혼자라면 한 끼 정도 건너뛰고 싶지만 나머지 가족까지 굶길 수는 없으니 밥을 하려면 서둘러서

움직여야 한다.

라면은 안 끓일 것이고 김치하나 달랑 놓고 밥 먹는 것은 너무하고, 스팸 굽고 햇반을 꺼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리 볶아놓은 김치볶음밥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바로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상용으로 사다 놓은 카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조리과정 때문에 얼핏 '준 인스턴트급'으로 보이기도 하나 다양한 채소로 영양소도 골고루 들어가

있고 맛도 좋은, 알고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요리이다.


간편한 일품요리지만 다채로운 재료색깔이 풍성한 비주얼을 자랑하고, 육류나 해산물이라도 챙겨 넣는다면 퀄리티가 2단계는 높아지는 고급요리가 된다.

평소에 입에 맞는 브랜드의 카레를 찾아놓았다면 맛에서도 실패할 일은 없으니 일단은 안심할 수 있다.

갖가지 채소와 취향껏 넣은 재료에 카레만 풀어서 끓이면 간은 저절로 맞춰질 것이고 농도를 애써 조절할 필요도 없으니 이런 걸 두고 '일거양득‘이라고 할까?

복잡한 조리 과정을 거친 요리만 수준 높은 요리인 것은 아니므로 이런 음식,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고품격 요리라는 것이 의외로 손쉽게 탄생하기도 하니까, 채소를 볶다가 물을 붓고 카레로 마무리하는 게 전부인 '카레'를 너무 소박한 요리로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소분해 두었던 쇠고기를 해동시켜 놓고 각종 채소를 손질해 두면 오늘 요리의 반은 해결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3첩 반상은 기본이고, 조금 더 신경 써서 5첩 반상도 간간이 올려주셨던 어릴 적 어머니의

정성과 수고로움에 새삼 한없는 감탄과 존경이 우러나올 뿐이다.

모든 면에서 훨씬 편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밥상 한번 차리는데도 시켜 먹을지 말지의 끊임없는

갈등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각각의 재료를 손질해서 무치고 조리고 끓인다.

밥을 좀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국종류도 매 끼니 올라온다.

이건 정말 가족을 위한 사랑과 정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고 유능함의 극치가 아닌가?

여러 가지의 반찬을 준비해야만 가족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것은 아니고 시대도 변했으므로 그런 단순한

기준으로 엄마의 사랑을 가늠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나라 밥상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5첩 반상>이라 함은 나에게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상차림이라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영양과 조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밥상을 매일 마주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썰어놓은 야채를 차례로 볶는다.




일단 만들기로 결정한다면 정말 손쉬운 조리과정 덕분에 눈감고도 해내는 수준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메뉴가 바로 카레인데, 만드는 일에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은 그 음식을 생각하면 부담감이 없어서 만들자고 결심하기도 수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너무 자주 식탁에 올렸다가는 가족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으니 자제해야겠지만, 그만큼 아쉬울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몸에 좋은 채소를 한대 넣고 저어주면 어느 순간 훌륭한 음식이 돼 가는 모습은 마치 요술램프에서 뿅~하고 보물이 나오는 것 같다. 만들기 쉬운 데다가 별로 싫어하는 사람도 없어서 내 돌려 막기 메뉴 중에서도

최고의 효자템이 되어주고 있다.


TV에서 엄마가 며칠간 집을 비울 때 카레 한솥을 만들어놓고 나가는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대충 정한 메뉴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카레가 한솥 끓인 '곰국과 같은 과'의 음식인가?

앗! 그럼 보양식이라는 말인데, '이 정도면 다른 반찬 안 해놔도 안심이다~'라는 속내가 같은 주부의

입장에서 짐작되었다.

어쨌든 만들기 난이도 하급인 요리 치고는 속도 든든히 채울 수 있고 영양면에서도 뒤처지지 않아서

엄마는 카레를 잔뜩 끓여 놓고 나가며 안심하셨을 테지.




내 입맛에는 더 진하고 깊은 맛이 나는 것 같아서 고형카레를 애용하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매일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틀에 박힌 일과가 지겹기도 하고, 가족들의 건강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은 반찬 하나를 정하는 일에도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시간과 체력이 바닥나도록 마냥 희생할 수는 없고 손쉽게 돈으로만 해결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지만, 가족을 위하는 마음에다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보탠다면 결국 명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고단한 하루 끝에 자신을 돌보는 가장 짧고 확실한 방법이란 영양을 신경 쓰더라도 간편하게 식사준비를

끝내는 것! 간편해서 즐겁고, 거창한 만찬보다 때로는 손쉽게 차려낸 한 그릇이 우리 삶을 더 가볍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생각도 든다.

한 그릇으로 보이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반찬을 이제 맛볼 시간이다.




가짓수 하나뿐인 반찬이라도 다채로운 맛이 매력적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