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국수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1988년작) 중에서
잔뜩 흐린 날씨에 눈인지 비인지 하늘에서 뭔가 내리고, 끄물끄물한 날에 생각나는 음식이라면 뜨끈한
국물이 있는 것들이다. 이런 기분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 같다.
날씨가 흐리다 싶으면 오늘은 뭘 좀 끓여볼까 하고 생각에 잠긴다.
내 단골 메뉴 중에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서 결과물이 월등한 몇 가지 요리가 있는데 잔치국수도 그중
하나다. 마트 가서 애호박만 한 개 사 오면 되니까.
이런 날에는 얼큰한 라면도 좋지만 볶은 국멸치로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어 만든 잔치국수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마성을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만큼이나 푸짐한 그 자태를 보면 이 음식이 왜 '잔치국수'여야 하는지 누군지도
모를 이의 작명센스에도 감탄이 나온다.
먹는 순간 입안에서는 폭죽이 터진다. 밥상의 잔치다!
은근한 불로 멸치 육수를 끓이는 동안 급하게 사온 애호박을 채 썰어서 한쪽에 놓는다.
잠시 후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갖은양념에 무치는 우리 집 잔치국수의 핵심이 되는 애호박나물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은 다른 호박반찬은 안 먹어도 국수 고명으로 올려진 호박나물은 잘 먹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합으로 등장하느냐가 중요한 것인지, 어쨌든 잔뜩 만들어놔도 국수 한 끼면 애호박은 눈 깜짝할 새에 모두 사라지고 만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기다란 호박 하나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2개 정도는 준비해서 고명의 양도 늘려야
할 것 같다. 넉넉하고 푸짐한 것이 잔치국수 고유의 캐릭터와 같아서 이 인상 좋은 음식을 부족하게 먹는 것은 뭔가 좀 아쉬운 생각이 든다.
기왕 해 먹는 거 맛있게 실컷 먹고 싶다. 배가 아주 볼록하게 나오도록 말이다.
이런.... 삶을 때마다 양조절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또 산더미처럼 삶아 버렸다.
소면을 삶을 때면 "모지라는 것보다 남는 게 낫다"라고 말하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나정이 엄마가
빙의된다.
딱 맞게 삶는다고 1인분씩 계량된 소면통을 활용해 끓인 날은 하필 기가 막히게 맛있게 만들어진 날이라서 더 달라는 요청이 이어지고, 모자라는 소면에 후회막급이었다.
그래~ 역시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게 더 낫지.
그때부터 잔치국수는 계량을 하지 않고 넉넉하게 만드는 음식이 되었다.
국수란 혼자 먹을 요량으로 단출하게 끓이기보다는 가족이나 지인 여럿이 모이게 되는 날에 만드는 일이 많은데, 소면 삶아서 멸치육수에 말아먹는 것이라는 게 말처럼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면발이 불지 않고 깔끔하게 만드는 게 관건인 만큼 면을 삶을 때는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혹시 냄비에 면이 눌어붙지는 않을지, 끓어 넘치지는 않을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면이 엉망이 되어
버릴지 모를 걱정으로 불조절을 하며 쉴 새 없이 저어주고 찬물도 부어가면서 이 까다로운 녀석을
살펴주어야 한다.
다행히 생각처럼 면이 잘 삶아졌다면 이제는 면기에 담기 과정이 남았다.
살살 감아준 소면 한 덩이를 담고 그위로 감칠맛 나게 잘 끓여진 멸치육수를 넉넉하게 부어준다.
정성껏 준비한 호박나물, 계란지단, 신김치까지 예쁘게 얹어서 차려주고 싶지만, 그러는 동안 애써 삶은
국수면발이 퉁퉁 불어버릴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만 해도 탱글탱글한 면발의 국수를 먹이고 싶은 마음에 손길은 분주해지고 각자의 취향을 존중해
준다는 핑계로 여럿이 먹을 때면 국물까지만 부어서 서빙하기로 한다.
고명은 각자가 원하는 대로 얹어서 먹기로 하자.
잔치상이 따로 있을까?
보기만 해도 가슴 밑바닥까지 든든해지는 국수 한 그릇이면 기분이 급상승하는데.
지금은 그냥 이 국수를 온전히 즐기는 일에 집중해 보는 시간이다.
뜨끈한 멸치육수에 말아낸 소면 위로 각자 취향껏, 양껏 고명을 올리는 일에 열심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젓가락 입안 가득 먹어본다. 국수는 이렇게 푸짐하게 먹어야 제맛이니까.
'역시 이맛이지~' 하는 공치사가 없더라도 묵묵히 가족들의 먹는 모습을 보면 맛이 있는지 없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년 차 주부의 평소 감대로만 만들었는데도 모두가 흡족해하는 식사가 완성되었다.
왜 잔치국수는 적당히 조금만 먹는 것이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지, 왠지 부족해 보이고...
비어 가는 그릇을 보면 기다렸다는 듯이 거의 반사적으로 한마디 하게 된다.
"더 먹어. 국수 많이 있으니까"
잔치국수란 애초에 넉넉하게 만들어 놓은 덕분에 잘 먹으면 더 먹으라고 자신 있게 계속 가져다줄 수
있는 음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