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 스파게티
-나이젤 슬레이터 '토스트(Toast)' 2003년작-
오늘 스파게티 해줄까?
'밥 하기'라는 노동으로 쌓인 지루함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면,
신기하게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다. 남편이다.
뭘 물어봐, 그냥 해주면 되지~
자기... 의리는 있다? 이로써 결국 우리는 한 팀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레시피를 완전히 암기한 남편의 주력 메뉴는 단 두 가지라서 나보다 더 빈곤한 형편인데 끼니 때울 음식을 뭐라도 해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빠가 해주는 스파게티를 아주 좋아한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본인 입맛에 맞춘 듯 다분히 이기적으로 준비한 메뉴로 보이지만 내 입에도
미트 스파게티보다 해산물 스파게티가 더 맛있으니까 가만히 입다물기로 했다.
신이 나서 오랜만에 요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었다가는 나만 손해 보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보통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준다고 하면 재료손질에서 마무리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해내는데, 집에서
음식을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도 내가 옆에서 재료준비를 도와줘야 하고
중간중간 그릇정리도 해줘야 주방이 그나마 봐줄 만하다.
본격적인 요리만 본인이 하는 모양새로만 보면 거의 수석 셰프의 포스다.
그래~까짓것 보조 역할을 기꺼이 해주자.
가족을 위해서 소중한 한 끼를 해결해 주겠다는데 이 얼마나 기특한 생각인가?
남편이 요리하는 모습에서 내가 감탄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검증된 레시피대로 완벽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지 좀 어설퍼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요리든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해낸다는 점이다. 그러다 망하면 망한 대로 그냥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나와는 달리 그는 요리에 실패할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는다.
그릇이나 냄비를 여러 개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단계도 최소한으로 줄어서 과정도 간단하다.
이상하게 옆에서 보기에는 참 대충 하는 것 같은데 먹어보면 맛도 좋다.
저렇게 쉽게 음식을 한다면 식사준비로 인한 스트레스도 별로 없을 것이다.
나처럼 음식마다 열과 성을 다하며 비주얼까지 챙기려 하는 것은 스스로 피로를 자초하는 일인 것 같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을 한평생 떠받들며 살아온 나에게, 몸이 편하려면 예쁜 떡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먹는 사람들은 비주얼 같은 것을 신경도 안 쓰는데, 내가 갖고 있는 능력보다 더 잘 만들어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은 좀 미련한 일일까?
궁색하게라도 변명을 해보자면, 매일 삼시세끼 가족의 식사를 신경 쓰는 사람과 한 달에 한두 번씩
가끔 콧바람 쐬듯 요리하는 사람과 식사 준비에 대한 부담감이 같을 수는 없다.
나도 남편입장이라면 한 끼 정도는 새털처럼 가볍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유치하게 단언해 보지만,
매일 하는 요리도 개인의 성격에 따라 중압감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앞으로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가족끼리 먹는 음식정도는 속 편하게 생각해보고 싶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라고.
사용하는 양념마저도 단조로운 내 요리보다 평소 안 쓰던 갖가지 '마법의 수프'(액젓, 굴소스 같은)를
비롯해서 낯선 식재료로 자유분방하게 만드는 아빠의 요리가 아이들에게는 더 흥미롭고 식욕이 당길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주방은 더욱 자유분방하게 어질러지겠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음식을 옷에 흘리고 입가에 묻히는 것을 참지 못해서 무척 깔끔하게 챙기는 편이었다.
때문에 커서 편식을 하고 음식을 복스럽게 먹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지금 다시 식습관을 바로 잡는다면 과연 나는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먹도록 해줄 수 있을지,
이번에는 얼마나 털털하게 대해 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뭐 이렇게 타고난 성격이니 보나 마나 또 까탈스럽게 굴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이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만, 대신 남편이 가끔이라도 요리를 해준다고 하면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그의 스타일대로 봐 넘겨서 자꾸 요리하고 싶도록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면 두 가지뿐인 ‘아빠표 요리’의 종류가 좀 더 다양해져서 그만큼 더 자주 남편의 손맛에 기대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대충 만든 것 같았던 남편의 해산물 스파게티의 비주얼은 훌륭했다.
당연히 맛도 있을 텐데,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