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완결
“엄마! 우리 집에 도둑 들었어?”
아들이 학교 다녀와서 보고 충격받은 광경은 다름 아닌 내가 만든 옷 무덤이었다.
100리터짜리 봉투 3개 분량의 옷이 거실 바닥에 어지럽게 쌓여있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도둑?
남들이 입은 모습 보고 나에게도 잘 어울릴 줄 알고 사고,
간절기에는 필수템이라서 사고,
비싼 브랜드 80% 폭탄 세일한다고 필요도 없는 원피스를 색깔별로 두벌이나 사고,
스트레스 푼다고 사고…,,
기준도 없이 입지도 않는 옷들을 사들인 무분별한 쇼핑이 귀중한 시간과 돈을 훔쳐간 꼴이 됐으니
우리 집은 정말 도둑이 들었던 게 맞구나!!
아들의 표현이 틀리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 옷들을 정리함으로써 철딱서니 없던 내 행적(?)을 어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나한테 어울리는 색깔이 아니라서,
내 이미지와 동떨어지는 디자인이니까,
이 옷을 입기에 이제 너무 늙어서…
거울 앞에서 일일이 입어보면서 하나, 둘 골라낸 옷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처분을 기다리게 된다.
우선 나에게만 필요가 없을 뿐 아직 멀쩡한 옷이며 충분히 중고 판매가 가능한 옷들은 깨끗이 세탁하여 종이박스에 담아 거실 한편에 쌓아둔다. 기부업체에 기부하기 위해서다.
입지 않는 옷을 조금이나마 돈을 받고 팔 수 있고 옷 정리도 되니 중고사이트에 올려서 거래를 하면 물론 좋겠지만 난 당장의 물건 정리가 목적이었으므로 비교적 빠른 처리가 가능한 기부 쪽을 택한 것이다.
어쩌면 옷에는 그다지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 갖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은 못 입는 옷들의 분류작업이 시작되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 오래 입어 변색되거나 보풀이 일어난 옷 등 나눔을 할 수도 기부도 할 수 없는 옷들은 고물가게에 내다 팔았다.
무게를 측정해서 돈을 받았는데 흥정을 하려는 게 아니었으므로 사장님이 주시는 대로 받았다.
그냥 버려도 그만인 것을 이렇게 돈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헌옷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베란다에는 작은 바구니가 하나 가 내걸렸다.
못 입는 옷 중에서 얇은 면 티셔츠 종류는 몇 벌 남겨놓았고 이것들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로 작게 잘라서 구멍 난 양말과 함께 그 바구니에 넣어둔다.
마음먹고 하는 청소는 자주 하기 어렵지만, 샤워하는 김에, 물건 꺼내는 김에, 손바닥 걸레로 쓱-닦아내면 여기저기 눈길 닿는 부분들을 수시로 청소할 수 있다.
더러워진 걸레는 먼지와 함께 버리면 끝이다.
이런 <미니 청소>는 시간을 따로 낼 필요가 없고 걸레를 빨아야 하는 과정이 없으므로 청소가 “만만하게”느껴지는 효과가 있었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청소방법일 듯싶다.
지금도 뭔가 찾으러 갈 때나 물건 정리할 때는 의례 손바닥 걸레 2장을 가지고 시작하곤 한다.
물건 못 버리는 아들에게서 멀쩡한 옷을 남 줘버린다고 한참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오랜 작업 끝에 우리 집 옷장은 살랑살랑 바람이 드나들 정도로 가뿐해졌고 내 마음까지 홀가분해졌다.
예전에는 옷으로 가득 들어차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옷장이 문을 닫아놔도 여유로운 공간이 그대로 느껴지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여백이란 것은 눈에 안 보여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옷 가짓수가 단출해지니 뭐가 어디 있는지 한눈에 보였고 무엇보다 “뭘 입어야 하는가~” 매일 하던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입을 게 없을 정도로 비워냈지만 그렇게 되니 오히려 입을 것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닌지.
가끔은 나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 삶의 무게를 두고 있으며 행복을 느끼는 분야는 무엇인지.
그걸 읽을 수만 있다면 누구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기준이 생기고, 남길 것과 떠나보낼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