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수 차례 고비가 왔어도 마치 아직 내 할 일을 다 못했다는 것처럼 언제나 다시 힘을 냈다.
엄마의 숙제는 자식들이 서로 가지고 있던 상처를 보듬어주고 이해와 화해를 시켜주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수년을 가장 가까이 있으며 엄마의 병원 생활을 함께한 막내딸. 그런 동생에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늘 미안한 언니와 오빠.
우리 남매는 사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딱히 우애가 깊다고 할 수도 없었다. 사는 게 너무 바쁘기도 했고, 거리상으로도 너무 멀리 산다. 그러다 보니 일 년에 한두 번이면 많이 본다고 할까?
엄마가 요양 병원에 입원하는 과정에서 우리 남매는 서로 미안해하면서도 상처를 주기도 했다. 묵혀있던 감정과 새로운 상황 앞에 솔직하게 감정을 다 표현하지 못한 채 서로 조심하는 게 최선이었다. 모두 마음의 여유가 없었으리라.
엄마를 보러 와도 다녀가기 바빴다. 오빠 따로 언니 따로. 엄마를 만나고 나온 후 마주 앉은 우리는 정작 하고 싶은 말 주위를 배회하다 헤어진다.
막내딸은 엄마 옆에 있으니 면회 오는 언니, 오빠를 다 만난다. 때론 불편했지만 엄마를 보러 오는 언니와 오빠를 항상 기다렸다. 엄마가 좋아하니까. 엄마에게 '내일 누구 온대'라고 말하면 뭐 하러 오냐고 귀찮은 척해도 이미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난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좋았다.
언니와 오빠가 서둘러 돌아가는 날엔 서운하고 속상했다. 조금 더 있다가지.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가지. 돌아가는 길이 멀다는 걸 알지만 오래 있다 갔으면 했다. 뭐라 해도 언니고 오빠니까.
서로 묵은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남매들을 엄마는 몇 번의 위기 상황으로 끌어모으고 서로 위로할 시간을 만들어 준다. 수술과 몇 번의 대학 병원 입원으로 서로 긴밀히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다.
그래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이번 고비는 못 넘길 것 같다라며 동동거리고 애타할 때 서로 힘이 되는 건 가족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후 엄마 면회를 올 땐 언니와 오빠는 서로 연락해서 함께 오는 날이 많아졌다. 면회 후 밥 먹고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고 헤어진다. 게다가 병원 주변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것도 감지덕지한 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교외로 나가서 새로운 음식도 먹고 멋진 디저트 카페도 찾는다.
다 엄마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병원에 누워 있어도 엄마는 엄마의 할 일을 다 안다. "이놈의 자식들 그냥 두면 남같이 살겠구나!"라고 말이다.
엄마는 행여나 당신이 떠나고 난 후,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같이 사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할 말을 속으로 삼키고 사는 아들이 혹시나 외로울까 봐 노심초사했다. 말 안 해도 오빠 속을 다 안다며 얘기할 때는 엄마가 어떻게 알아? 어깃장을 놓기도 하지만 나도 오빠의 마음을 조금은 안다. 한 뱃속에서 나온 동생이니까.
사는 게 팍팍한 큰 딸은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 따라오려면 택도 없다." 하면서도, 당신의 재주를 물려받은 딸이 그 재주를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걸 애달파했다. 먹고 사느라 쉴 틈 없이 허우적대는 딸의 모습은 엄마의 한숨이었다.
애물단지 자식들은 그나마 엄마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만난다지만 그 후는.... 엄마는 그것을 염려했다. 남보다 못 한 사람들처럼 살까 봐.
그래서 가끔 위기 상황도 만들어 주는 건가? 서로 보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아껴주라고. 그런 것이라면 엄마는 대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