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앞서 미리 말하자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 한복판에서 태어난 1960년대 생 아버지를 두었지만, 나의 아빠는 가부장과는 정 반대에 서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이 모두 딸로 태어나 친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셋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외칠 때에도 아빠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아들 필요 없다. 나는 딸이 최고다!!"라고 외치는 사람이었다.
아들 귀한 집안 장손의 첫 손주인 내 이름을 지을 때 할머니는 누가 들어도 남자 같은 이름을 가져와 고집을 부리셨다. 딸에게 차마 그 이름을 줄 수 없었던 아빠는 직접 사전을 펼쳐 예쁜 한글 이름을 찾았다. "슬기랑 이슬이가 예쁜데... 이슬이로 지었다가 밤이슬 맞고 돌아다니면 걱정돼"라며 슬기로 확정 짓고, 할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출생신고를 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빠는 항상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주 6일 근무를 하던 시절에도 토요일 점심이면 우리를 차에 태워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주말은 아빠 뒷자리에 앉아 지도를 보며 길을 찾던 모습으로 가득하다. 엄마가 어린 동생을 돌보는 사이 아빠는 나와 함께 지도를 펼쳐놓고 이번 주에는 어디를 갈지 상의했고, 내가 주도적으로 길을 찾아볼 수 있도록 지도 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조금 더 크고 나자 아빠는 당시 거금을 주고 필름 카메라 하나를 사주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간 낙산사에서 아빠는 "슬기가 눈으로 보는 풍경과 마음으로 보는 풍경에 집중해 카메라로 찍어보렴. 같은 사진이라도 남이 찍은 사진과는 다른 모습이 담겨있을 거야"라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날의 온도와 습도, 바닷바람의 짠내와 셔터를 함께 눌러주던 아빠의 온기를 모두 기억한다.
아빠는 주말마다 온갖 음식을 해주었다. 일요일 점심엔 직접 춘장을 볶아 만든 짜장면이, 직접 회를 떠 만들어준 초밥이 상을 가득 채웠고, 광어는 지느러미 부분이 제일 맛있다는 것도 아빠에게 배웠다. 내가 방학을 해 집에 있는 날이면 나와 동생을 차에 태워 아빠 회사에 데려갔다. 가족 친화를 중시하는 요즘과 달리 경직된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2000년대 초반, 아빠는 토요일에는 자녀를 데리고 회사에 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빠가 일하는 동안 나는 동생과 이면지에 그림을 그리며 놀고,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멋있게 지켜보았다.
고등학생이 되며 학원을 다니느라 더 이상 주말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자 아빠는 일요일마다 나를 데리고 호수공원에 자전거를 타러 갔다. 해뜨기 전 학원에 가 한밤중에 들어오는 딸을 위해 아빠는 유부초밥으로 도시락을 만들고 돗자리를 챙겼다. 일주일에 단 하루, 아빠와 자전거를 타며 마음껏 햇볕을 쬐고 시원한 바람을 맞고 햇볕에 빛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던 순간은 내 학창 시절에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낸 적이 없고, 당연히 아빠에게 맞아본 적도 없다. 아빠는 언제나 자상했고, 나랑 노는걸 제일 좋아했고, 매일 저녁 함께 뉴스를 보며 정치 사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아빠는 최고의 아빠였고 나는 반드시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다짐해왔었다.
그리고 스무 살 봄, 운명처럼 아빠와 똑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J는 아빠처럼 말이 많고 잔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준다는 점이 똑같았다. 아빠처럼 J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아빠처럼 자상했고, 아빠처럼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J와의 결혼이 두렵지 않았다.
볼 때마다 눈물이 나는 그 날의 아빠 뒷모습
결혼하던 날, 아빠는 나보다 더 신나 있었다. 신부 입장을 하며 j에게 내 손을 넘겨주지 않는 퍼포먼스를 해 하객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주었고, 주례 대신 준비한 덕담 시간에 아빠는 아빠다운 글을 써 읽어주었다. 덕담 마지막에 "뿌잉뿌잉~"이라고 하며 귀여운 행동을 해 하객들이 또 한 번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그 모든 장면보다, 나는 신부대기실에서 입장을 준비하며 아빠와 단 둘이 남겨진 시간이 더 또렷하게 남아있다. 하회탈처럼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은 아빠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신나게 결혼식장을 축제로 만들어놓고 정작 스냅사진에 찍힌 아빠는 눈물을 참느라 눈꼬리가 한없이 축 처져있었다. 그리고 결혼 1주년이 되던 날, 섬세한 아빠답게 1주년에 맞춰 도착한 편지에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바라는 마음이 정갈한 필체로 가득 담겨있었다. 세상에 이런 아빠가 또 있을까.
주 6일을 꼬박 일하고도 바다가 보고 싶다는 딸의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동해바다로 향하던 젊은 아빠는 이제 환갑을 앞두고 있는 중년이 되었다. 여름 햇살에 반짝이던 피부와 머리는 이제 희끗한 흰머리와 주름으로 덮여버렸지만 아빠는 여전히 따뜻함 그 자체이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빠가 20년간 빈틈없이 채워준 모든 것들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자산이 되었다. 언젠가 내가 부모가 된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나도 아빠 같은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하다. 나는 아빠의 소중한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