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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e Sep 13. 2024

쏟아지는 폭우처럼 요동치는 마음   

하필, 오늘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아침잠 많기로 소문난 내가, 오늘은 새벽부터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소리와 무섭게 베란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유난스럽게 울리던 휴대폰 진동의 이유는 각종 재난문자였고, 이미 몇 통씩이나 쌓여 있었다. 급하게 유튜브를 켜서 뉴스를 확인해 보니 하필, 오늘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남편은 벌써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데 운전할 남편이 걱정되어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남편이 출근할 땐 자느라 배웅 한 번 안 해주는 게으른 아내였는데 오늘은 폭우 덕분에(?) 운전 조심하라는 얘기를 건네면서 다정하게 배웅까지 해줬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조금 뭉그적 대니 회사에 잘 도착했다는 남편의 카톡이 왔다. 그래, 여기까지는 참 좋았지.


그놈의 폭우 때문인 지 아파트 배수관이 고장 나서 물을 사용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렇게 예고 없이 단수가 된 적은 처음이라 꽤나 당황스러웠다. 정수기는 당연히 안 나오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으니 집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비상용으로 사둔 생수로 몇 시간 동안 집에서 버텼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비장하게 노트북까지 챙겨서는 배수관이 다 고쳐질 때까지 카페에 가있을 작정이었다. 나가는 길에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언제쯤 고쳐질지 물어보니 아직 확인 중이고, 오늘 안에 끝날 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남편에게 얘기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일이 바쁜지 계속 부재중이었다.


어차피 언제 고쳐질지 모르니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스벅으로 향했다. 재택근무 하면서 집중이 안 되면 곧잘 가던 곳이었다. 노트북까지 챙겨 온 마당에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도 처리할 작정으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스벅에서 할인 행사를 하는 중이었다. 속으로 '집에 물이 안 나와서 카페에 왔는데 커피가 할인 중이네. 완전 럭키비키잖아?'라고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요즘 유행하는 원영적 사고가 이런 거지!' 하며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래, 이때까지도 참 좋았다. 커피를 몇모금 마셨을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에게 오늘 내가 겪은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생각 해 신이 나서 전화를 받았는데 이게 웬걸? 며칠 전에 남편과 내가 함께 신청해 둔 지역 PAY 실물카드가 하필 오늘 배송된다고.. 꼭 직접 수령해야 한다는 거다.


 "나 지금 밖인데? 물이 안 나와서 카페 왔어"

 "아직도 물 안 나와? 근데 직접 수령해야 한다잖아. 이제 슬슬 집에 가"

 "여기 온 지 30분도 안 됐는데.."

 "그럼 어떡해? 기사님 지금 오신다는데.. 부탁해"

 (뚝...)


원영적 사고는 무슨... 남편과의 그 짧은 통화 한 번에 갑자기 기분이 엄청 다운됐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반절도 채 먹지 못한 커피를 치우면서 입이 댓 발 나왔다. 아침에는 그렇게 애틋하게 배웅했던 남편이 이번에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아까 내 전화는 안 받았으면서 기사님 전화는 어떻게 받았대? 참나..' 남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냥 그 순간에는 괜히 남편이 원망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고..'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집에 가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태도에 짜증이 났다. 노트북까지 챙겨 비장하게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단수된 집에 또 혼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착잡했다.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기사님이 오셔서 무사히 카드를 수령했다. 카드를 받고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다.


"집에 잘 갔어? 기사님 연락받았어?"

"응.. 방금 카드 받았어.."

"목소리가 왜 그래.."


누가 들어도 기분이 상해 있는 목소리였을 거다. 나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이 나왔다.


"너 전화받고 커피도 못 마시고 바로 나왔어.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 쓰고 너무 불편해서 카페 간 건데.."

"아...기사님이 오신다고 해서...근데.. 이게 내 잘못이야..?"

"... 너 잘못 아닌 거 알아 그냥 이 상황에 짜증이 난 거지. 아까 카페 간다고 전화한 건데 내 전화도 안 받고.."

"일하느라.. 회의하느라 못 받았지.. 언제 고쳐진대?"

"아까 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까 오늘 안에 안 고쳐질 수도 있대"

"아고.. 큰일이네. 비 오는 데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겠다.. 있다가 퇴근하면서 다시 전화할게"


남편의 다정한 한마디에 또 순간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급수를 다시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언제 고쳐질지 모른다던 배수관이 그새 해결된 것이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했던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평소보다 더 콸콸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괜스레 민망해진 마음에 손을 박박 씻으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아야지!' 예상치 않게 쏟아진 폭우처럼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로 하루 종일 요동치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전화가 오면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남편이 좋아하는 치킨을 먹자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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