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오늘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아침잠 많기로 소문난 내가, 오늘은 새벽부터 울려대는 휴대폰 진동소리와 무섭게 베란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유난스럽게 울리던 휴대폰 진동의 이유는 각종 재난문자였고, 이미 몇 통씩이나 쌓여 있었다. 급하게 유튜브를 켜서 뉴스를 확인해 보니 하필, 오늘은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남편은 벌써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데 운전할 남편이 걱정되어서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 남편이 출근할 땐 자느라 배웅 한 번 안 해주는 게으른 아내였는데 오늘은 폭우 덕분에(?) 운전 조심하라는 얘기를 건네면서 다정하게 배웅까지 해줬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조금 뭉그적 대니 회사에 잘 도착했다는 남편의 카톡이 왔다. 그래, 여기까지는 참 좋았지.
그놈의 폭우 때문인 지 아파트 배수관이 고장 나서 물을 사용하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렇게 예고 없이 단수가 된 적은 처음이라 꽤나 당황스러웠다. 정수기는 당연히 안 나오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으니 집에 있는 게 고역이었다. 비상용으로 사둔 생수로 몇 시간 동안 집에서 버텼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집을 나섰다. 비장하게 노트북까지 챙겨서는 배수관이 다 고쳐질 때까지 카페에 가있을 작정이었다. 나가는 길에 관리사무소 직원에게 언제쯤 고쳐질지 물어보니 아직 확인 중이고, 오늘 안에 끝날 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남편에게 얘기하려고 전화를 걸었는데 일이 바쁜지 계속 부재중이었다.
어차피 언제 고쳐질지 모르니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스벅으로 향했다. 재택근무 하면서 집중이 안 되면 곧잘 가던 곳이었다. 노트북까지 챙겨 온 마당에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도 처리할 작정으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스벅에서 할인 행사를 하는 중이었다. 속으로 '집에 물이 안 나와서 카페에 왔는데 커피가 할인 중이네. 완전 럭키비키잖아?'라고 나도 모르게 되뇌었다. '요즘 유행하는 원영적 사고가 이런 거지!' 하며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래, 이때까지도 참 좋았다. 커피를 몇모금 마셨을까?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에게 오늘 내가 겪은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얘기할 생각 해 신이 나서 전화를 받았는데 이게 웬걸? 며칠 전에 남편과 내가 함께 신청해 둔 지역 PAY 실물카드가 하필 오늘 배송된다고.. 꼭 직접 수령해야 한다는 거다.
"나 지금 밖인데? 물이 안 나와서 카페 왔어"
"아직도 물 안 나와? 근데 직접 수령해야 한다잖아. 이제 슬슬 집에 가"
"여기 온 지 30분도 안 됐는데.."
"그럼 어떡해? 기사님 지금 오신다는데.. 부탁해"
(뚝...)
원영적 사고는 무슨... 남편과의 그 짧은 통화 한 번에 갑자기 기분이 엄청 다운됐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반절도 채 먹지 못한 커피를 치우면서 입이 댓 발 나왔다. 아침에는 그렇게 애틋하게 배웅했던 남편이 이번에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아까 내 전화는 안 받았으면서 기사님 전화는 어떻게 받았대? 참나..' 남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그냥 그 순간에는 괜히 남편이 원망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고..' 내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단호한 목소리로 집에 가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태도에 짜증이 났다. 노트북까지 챙겨 비장하게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단수된 집에 또 혼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착잡했다. 답답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기사님이 오셔서 무사히 카드를 수령했다. 카드를 받고 멍하니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데 남편에게 또 전화가 왔다.
"집에 잘 갔어? 기사님 연락받았어?"
"응.. 방금 카드 받았어.."
"목소리가 왜 그래.."
누가 들어도 기분이 상해 있는 목소리였을 거다. 나도 모르게 원망 섞인 말이 나왔다.
"너 전화받고 커피도 못 마시고 바로 나왔어.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 쓰고 너무 불편해서 카페 간 건데.."
"아...기사님이 오신다고 해서...근데.. 이게 내 잘못이야..?"
"... 너 잘못 아닌 거 알아 그냥 이 상황에 짜증이 난 거지. 아까 카페 간다고 전화한 건데 내 전화도 안 받고.."
"일하느라.. 회의하느라 못 받았지.. 언제 고쳐진대?"
"아까 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까 오늘 안에 안 고쳐질 수도 있대"
"아고.. 큰일이네. 비 오는 데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겠다.. 있다가 퇴근하면서 다시 전화할게"
남편의 다정한 한마디에 또 순간 기분이 사르르 풀렸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급수를 다시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언제 고쳐질지 모른다던 배수관이 그새 해결된 것이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을 고단하게 했던 수도꼭지를 틀어보니 평소보다 더 콸콸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괜스레 민망해진 마음에 손을 박박 씻으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그래,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아야지!' 예상치 않게 쏟아진 폭우처럼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로 하루 종일 요동치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전화가 오면 평소보다 더 다정하게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남편이 좋아하는 치킨을 먹자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