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당당하게

- 졸업하는 제자들을 생각하며

by 별숲지기


서서히 당당하게

별숲지기 시소샘



같은 길을 걸었지만

같은 길이 아니었다


새로이 올라온 들꽃들이 모여앉아

풍성히 피어오른 향기로 닿아오니까


노오란 애기똥풀은 꿈길로 젖어들고

어느새 달맞이꽃이,

또 다른 꽃벗들 사이에서 고개들고


여름의 문을 닫고 깨어난 들국화가

시원하게 기지개를 펴고 있으니


들꽃은 이토록 바람의 감촉을 타고

가볍게 오르락내리락

마음을 두드린 계절의 문을 열고

산에서부터 강물, 나무, 바위 곁까지


자기의 길로 발을 깊숙이 내딛어야

온전히 피어나는 것을 알려주면서


똑같은 시간에 깨어나

여기에서만 피어나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을 한없이 연민하듯


기다림으로 맺어가는 꽃잎을 믿지 못하고

비교의 잣대를 돌려

이리저리 비틀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쉿,

바람의 소리를 간절히 음미한다면

자기만의 꽃내음을 지을 수 있고

찬 오르막길까지 끝끝내 걸어갈 수 있다고


아직도 휘청이는 여린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며 밀려오더니


오후의 빛으로 더욱 훈훈해진 들꽃들이

넉넉히 다가와 쑤욱,

손을 내민다


괜찮니?

괜찮아!





입시지도를 하다 보면 유독 마음에 오래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정말 이 학생은 꼭 뽑혀야 하는데, 왜 떨어졌을까?’

모든 것이 상대평가인 만큼, 더 준비된 학생이 있다면 뒤로 밀리는 상황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 한편이 오래 무거워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3년 동안 입시로 마음을 애태우던 아이들, 고1 때 국어를 가르치며 조금 더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아이들이 2026년 1월 8일, 졸업을 했습니다.


며칠 전, 몇몇 아이들이 앨범을 들고 제게 찾아왔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에 메시지를 남겨 달라면서요. 이미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글로 빼곡히 채워진 앨범이었습니다.

5층에 있는 제 자리까지 찾아와 준 것이 고마워, 한 글자 한 글자 제 마음을 곱게 옮겨 적었습니다. 먼 훗날 이 글이 아이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대학에 합격한 아이도, 다시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아이도 모두 제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인사를 남깁니다.

교무실 문밖으로 멀어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2022년, 고3 담임이었을 때 만났던 한 여학생이 떠올랐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 담당을 자청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물론 봉사 시간을 위해 신청자가 몰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 아이는 그런 계산을 하는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이 휴지통 주변에서도 사진을 찍을 만큼, 늘 깨끗하게 비우며 교실의 청결을 묵묵히 책임져 주었으니까요.

해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유독 가고 싶어 하는 4년제 사립대학교가 있습니다. 집에서 버스 한 번이면 닿을 수 있어, 아이들에게는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학교이지요.

이 학생은 ‘앞으로 어떤 직업인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과학보다는 사회 계열 공부에 더 흥미를 느끼며 경영학과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내신 성적으로는 해당 대학 경영학과 합격 사례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마케팅에 대한 호기심과 관련 교내 활동들이 생활기록부의 여러 항목에 비교적 잘 드러나 있었기에, 학생부 종합전형을 중심으로 준비해 보기로 했고 3월부터 차분히 과정을 쌓아 나갔습니다.

플래너를 통해 자신의 하루를 점검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목표에 대한 다짐을 잊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 결과 전년도에 비해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이 조금씩 향상되었고, 큰 흔들림 없이 성실하게 3학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수시 원서 작성을 앞두고, 우리는 지원할 대학 여섯 곳을 함께 정하기로 했습니다.

학기 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대학은 다소 상향이었지만, 학교생활기록부에 담긴 그동안의 과정을 믿고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도전하기로 했지요.

안정 지원으로는 교과 전형으로 지방 사립대 한 곳을 선택했고, 나머지는 모두 상향 지원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부모님께서 지방이지만 국립대에 대한 호감이 있으셨기에 집과 가까운 국립대를 권했는데, 학생 역시 마음이 끌렸는지 같은 학과를 교과 전형과 종합 전형으로 모두 지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교과 전형 4개, 종합 전형 2개를 결정한 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아낌없이 함께 보냈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고3 담임을 맡아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기소개서 작성과 면접 준비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유독 깊어지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2022년 고3 학생들까지는 자기소개서가 남아 있었기에, 여러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의 글을 함께 살펴보며 기꺼이 피드백을 나눠 주셨습니다.

자소서와 면접 지도는 한 학생을 성적 너머의 존재로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합격을 향한 간절함으로 머리를 맞대고 서류를 검토하고, 마주 앉아 면접을 준비하던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분명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과 가까운 대학이었고, 가장 간절히 바랐던 사립대학교에 1차 합격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발표 직후 곧바로 면접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우리는 원서를 작성하던 순간부터 생활기록부를 토대로 질문을 만들어 가며 준비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면접 준비 과정은 비교적 차분하게 이어질 수 있었지요.

아이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연습했고, 면접장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종 합격자 발표에서 돌아온 결과는, 합격을 기대하기 어려운 예비 번호였습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은 그 여파가 며칠 뒤 치러질 수능시험까지 이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수능 최저를 충족하지 못했고, 교과 전형으로 지원했던 지방 국립대마저 불합격 소식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선택지는 지방 국립대의 학생부 종합전형 하나뿐이었습니다. 이곳 역시 서류 합격 상태였기에 수능 이후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지만, 이미 한 번의 좌절을 겪은 뒤라 마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새벽, 가족 모두가 함께 면접장으로 향했고, 이른 아침 면접을 마친 뒤 아이는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선생님, 전처럼 대답을 못한 질문은 없었는데… 기대는 못 하겠어요. 그때도 잘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미 다섯 개 대학에서 불합격 소식을 받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이 대학은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기대어 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전문대학까지 살펴보며 원서 접수를 마쳤지만,

다행히 지방 국립대 경영학과에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순간을 3학년 담임 선생님들과 함께 기뻐하며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학생이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해 왔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직접 가르치지 않았던 선생님들까지도 한마음으로 기뻐해 주셨습니다.
“인성으로 대학을 간다면, 이 아이를 제일 먼저 추천하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분께서 건네주셨지요.
그런 아이였습니다.


학생을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마음을 같은 결로 읽어 준 그 대학교가,
참 고마웠고, 더욱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학생부 종합전형 상담을 할 때는, 저 역시 막연함이 컸습니다.

꿈이 분명한 아이들만을 위한 전형처럼 느껴졌고,

그렇다면 아직 꿈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어디에 서야 할지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아직 꿈이 없는데도 학종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혹은


“꿈이 바뀌면 그동안의 활동은 다 의미 없어지는 건가요?”


저는 이제 이렇게 대답합니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떤 태도로 지나왔느냐라고요.

꿈이 없기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탐색해 본 시간,

확신이 없어 실패하면서도 다시 시도해 보았던 과정,

방향이 바뀌어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시험해 보려 했던 태도.

저는 그 모든 시간이 충분히

‘꿈을 향해 쌓아 온 활동’이라고 믿습니다.


작년 여름, 후배들을 위한 ‘꿈마중 대학생 멘토링’ 시간에 이 학생을 초청하고 싶어 연락을 해 보았습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돌아왔고, 그 짧은 문자 속에서 아이의 행복한 표정이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또 말로 다 전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간을 견뎌 낸 후, 세 번의 도전 끝에 체육교육과 합격 소식을 전해 준 제자의 얼굴도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들 모두에게서 저는 같은 얼굴을 봅니다.


노란 개나리와 국화가 피는 시기가 다르듯, 아이들 역시 저마다의 시간과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그렇게 스스로 피어날 수 있도록 곁에서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 그것이 제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 곧 저의 행복이었기에 여기까지 씩씩하게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해 응원합니다.

나아가는 길이 힘겨워 주저앉게 되면 잠시 멈추어 이 말을 떠올리기를.


시간이 다가오면 스스로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들꽃이 그러하듯 말없이 밀어주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당당하게 다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 자기속도 # 기다림의 미학 # 입시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