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대답에서 길찾기

- 질문의 힘 1

by 별숲지기


제자의 대답에서 길찾기

- 질문의 힘 1


별숲지기 시소샘


심심하다는 너에게

심심하지 않게 질문을 건넸는데

심심(甚深)한 대답을 보내주었다


흰 바탕에 얹힌 검은 글자들이

윤슬처럼 푸르게 반짝이고 있다


너의

대답은


정지한 대지를

곱게 일으켜주는


샛노랗게 단단할

가장 가벼운


민들레

홀씨였다






대학교 수시 발표가 모두 끝날 즈음 3학년 교실로 들어가면 대부분 체험학습을 쓴 상황이라 교실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몇 명 없었습니다.

‘진로와 직업’을 맡아 일주일에 2번 들어가는데 들어갈 때마다 그 풍경이 똑같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자격증 공부를 하거나 조용히 자는 등 이렇게 홀로 뭔가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있는 반면에, 삼삼오오 모여 각종 게임을 함께 하는 학생들도 있지요.


한참 게임을 하던 아이가 기지개를 켜며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이제 너무 심심해요”


심심하다는 아이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교 합격 수기를 모아 후배들의 입시 준비를 위한 참고 자료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새내기 진로 교사이다 보니 무언가를 계획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한번 해보지 뭐” 하는 마음이 더 앞서는 것 같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남은 날을 세어 보니 딱 열흘이었습니다. 이 기간 안에 아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설렘을 안고 분주히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계획 없이 시작한 일이어서, 제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찾아가 먼저 취지를 설명했습니다.

모두 열 명이었지요. 마침 심심했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며, 제가 만든 질문지를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질문지에 먼저 생각을 적어 왔고, 저는 그것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질문지에 담긴 아이들의 생각을 읽으며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 기록들은 제 마음을 뜨겁게 만들었고, 그 자체로 감동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일이었기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거창하지 않은, 단 네 개의 질문이었지요.


1. 합격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2. 보다 효과적인 입시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지원해 주었으면 하는 프로그램은?
3.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은?
4.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즉흥적으로 만든 질문이었지만, 아이들의 답은 놀라울 만큼 깊고 성실했습니다.

그 답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1번의 이유가 곧 2번이었고,
4번의 이유가 곧 3번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는 각 부서마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아이들의 참여도가 특히 높은 활동으로는 연구부의 또래 멘토링, 교육과정부의 동아리 활동과 프로젝트 봉사활동, 학생안전부의 학생회 활동과 힐링 콘서트 등이 있습니다.

창의인성부는 도서관 행사를 중심으로 한 탐구·토론 활동과 작가와의 만남을 운영하고, 과학교육부는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밖에도 각 교과 담당 교사들과 학년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학교 곳곳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지요.


그렇다면 진로진학부를 맡고 있는 저는 무엇을 했을까요?


인문계 고등학교의 진로·진학 교사는 대입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는 역할이 일반적이지만, 저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알아가고 깊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꿈마중 나로와서당 ‘책 속에서 길찾기’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조금씩이라도 이 경험을 쌓는다면 분명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혼자 오래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다만 빠른 효과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제 방식이 다소 이상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제가 진행한 행사가 총 20개라는 사실을 보고서를 쓰며 알게 되었고, 그 숫자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혼자 해낼 수 있었구나 싶어서요.

또 20건의 행사마다 참여한 학생들의 생기부 특기사항을 작성하다 보니 약 1,500건이 되었습니다.
학년 전체가 참여한 행사들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돌이켜보면 저는 거의 매일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며, 생기부를 쓰고 상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행사의 의미나 그것을 해내고 있는 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듯합니다.

이건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선생님들 대부분에게 해당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방학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면, 몸과 마음의 탈진을 거의 모든 교사가 함께 겪고 있으니까요.


방학은 교사의 시간을 부드럽게 만져줍니다.
지친 몸과 마음을 돌아보며 새롭게 만날 아이들을 떠올리게 하지요.
그런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참 행복합니다.


내년에 무엇을 더 해볼 수 있을지 상상하는 그 시간들 속에서,
아이들의 대답이 흩어져 있던 제 생각을 모아주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의 방향을 또렷하게 알려주었지요.


'보다 효과적인 입시 준비를 위해 학교에서 지원해 주었으면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이 질문을 던진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학교에서 지원받는 여러 면접 관련, 생기부 활동 프로그램의 수혜를 많이 입었던 저로서는 큰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이러한 프로그램이 그저 없어지지 않고 조금씩 보완해 나가며 좋은 형태로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 윤리교육과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학교에서 운영했던 선배와의 만남과 면접 프로그램이 좋았기 때문에 해당 프로그램이 지속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를 통해 선택과목과 생기부 아이디어 등을 얻을 수 있었고 면접 프로그램을 통해 면접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치의예과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여름방학 전에 하루 종일 자율 보고서 작성 활동을 했는데 그때 참 많은 것을 깨닫게 되어 이런 프로그램을 지속했으면 좋겠습니다’ - 한의예과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저는 모든 과학 관련 행사에 꾸준히 참여해 동영상 제작, 자율주행차, 풍력발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처럼 진로가 확실한 친구들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막연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학교 프로그램도 너무 좋지만 교과 탐구 주제를 찾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해 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친구들이 챗 GPT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개인의 궁금증을 바탕으로 교과과정에서 연계할 수 있는 주제를 찾을 수 있다면 많은 친구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기계공학부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예체능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체육, 음악, 미술, 예술 등의 계열로 나누어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진로를 정할 때 혼자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것보다 체험하면서 확신을 갖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연기학과에 합격한 학생의 이야기



아이들의 글을 읽고 정리하면서 제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모든 부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는 깨달음이 들었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더 자주 듣고, 각 부서를 맡은 부장님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피드백 속에서 행사의 의미를 되짚고 다음 활동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 생각에 머물다 보니, 2025년의 제 모습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졌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서만 일해 왔던 거지요.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5층에 홀로 남아 있으면서요.


이제 저는 두 가지를 고민해 보려 합니다.
주제 탐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주제 찾기 방법, 그리고 생활기록부의 체계적 기록을 돕는 학생 주도적 프로그램 설계 방법입니다.

충분히 고민한 결과를 다른 선생님들과 나누다 보면,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좋은 프로그램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아이들의 글은 제게 미래를 설계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사는 이래서 참 행복합니다.


그런데 어떡하지요.
‘책 속에서 길찾기’만은 힘들어도 꼭 하고 싶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마음껏 하기 위해 제가 진로 교사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하는 프로그램도 역시, 그 바탕은

나로와서당 ‘책 속에서 길찾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