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3)
공산당 선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관계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관계에 초점을 맞춰 최종적으로는 부르주아 사회가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는 어떻게 태동된 것일까? 부르주아는 거대한 공장을 경영하고 있는 자본가들을 의미한다. 이 자본가들의 시작은 면직 공장에서 시작되었으며, 산업혁명이 이들의 부를 축적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런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양들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초식동물인 양이 어떻게 사람을 잡아 먹는 육식동물이 되었을까? 이것은 단지 비유적인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기 직전 유럽에서는 양모산업이 큰 인기를 끌었다. 양모 산업은 돈이 가장 많이 되는 사업이기에 귀족들의 대부분은 양모산업에 뛰어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 양모 산업에 뛰어드는 것이 무엇인 문제인가?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당연히 돈이 되는 쪽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적인 상황을 한 번 살펴보자. 당시는 귀족과 농노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던 봉건주의 사회였다. 농노는 귀족의 영토를 소작하고 일정부분을 바치고 나머지 몫으로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해 갔다. 그런데 귀족들은 양모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양을 키워야 한다. 양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다 바로 양을 먹일 목장이 필요하다. 그럼 양의 목장은 어디에서 구해야할까?
귀족은 양을 키울 목장을 만들기 위해 소작지를 뺏어버렸다. 즉, 소작농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토지를 잃어버리고 기근에 허덕여야 했다. 농사 지을 땅이 없어진 소작농들이 배고픔에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토마스 모어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작농을 내쫓고 양을 키운 귀족들들은 과연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까?
자! 수요와 공급의 관계를 따져보자. 처음에 양모 사업, 양모를 제공하는 사업은 돈이 되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귀족들이 양모를 생산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양모는 가격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당연히 하락할 수밖에 없다. 자! 여기서 다시 생각하자. 양모의 가격이 하락했다. 그럼 다시 소작농을 불러들이면 되지 않겠는가? 이미 양 목장으로 변한 땅을 다시 소작지로 변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양모 산업으로 망한 귀족들의 땅 대부분은 토지 집중의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농, 돈이 많은 부농에게로 토지가 몰린 것이다. 즉 귀족이 적당히 분배하고 있던 땅이 부농에게 모여들어 한 사람의 소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산업혁명으로 기계를 보유한 자본가와 부농이라는 새로운 시민 계급이 출현한 것이다. 이들은 귀족보다 돈이 많고 더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 그런데 신분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인 혜택을 하나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유물변증법을 생각해보라. 봉건주의 사회라는 '정'의 사회가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귀족과 부르주아의 처지가 역전되었다. 드디어 '반'의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합'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합의 세계는 무엇일까? 바로 시민계급,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권을 쥐는 사회이다. 그래서 합의 세계인 자본주의 무한 경제의 사회, 신분제가 무의미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작지를 잃어버린 소작농들이 문제가 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들은 부농의 밑으로 들어가거나 부르주아가 운영하는 공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바로 착취가 시작된다. 왜 착취가 시작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소작지를 잃어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난한 자들이 많아졌다. 부농도 부르주아도 원할 때면 언제든지 노동자를 구할 수 있다.
자! 다시 수요와 공급으로 넘어오자. 노동자의 수요가 넘쳐흐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렇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노동의 가치가 하락한다. 인간에게 가장 신성한 것인 노동의 가치, 그것이 바로 하락하는 것이다. 100원을 주고 노동을 시켜야했던 노동자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90원을 줘도 일할 사람이 넘쳐난다. 아니 80원을 줘도 일할 사람이 넘쳐 난다. 하루 12시간 일을 시켜도, 16시간 일을 시켜도 일할 사람이 넘쳐 흐른다.
여기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극심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부르주아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착취이다. 아무리 심한 착취를 해도 프롤레타리아는 넘쳐 흐르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유물변증법으로 들어가보자. 여기에서 부르주아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는 '정'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극심하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반'의 세계가 나타나야 한다. '반'은 프롤레타리아의 착취와 모순이다. 그러니까 '합'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의 세계의 '혁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프롤레타리아에게 '반'의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누구냐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단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 세계에 있는 부르주아다. 부루주아는 더 큰 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 당연히 프롤레타리아의 힘은 커질 것이다.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의 힘이 커지면 '반'의 합당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합'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합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사람들마다 달랐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마오쩌뚱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서 합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외쳤다. 하지만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없이 곧바로 '합'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외쳤다. 이 둘은 같은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과정의 차이로 인터네셜에서 극심한 대립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결과를 이야기하고 싶다. 결과론적으로 그들이 바란 세상, 최종적으로 도래해야할 세상은 같다. 그것은 바로 코뮤니즘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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