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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균탁commune Feb 24. 2023

코뮤니스트로 살아가기

공산당 선언(5)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단 선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유물 변증법과 사적 유물론의 발전 단계에 따라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타파하는 것을 의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작물 여러군데에서 변증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변증법은 사실 고대부터 있었던 이야기다. 피히테에 의해 처음으로 그 이름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논리학을 우선에 두면서 변증법은 역사의 뒤안 길로 살아졌다. 칸트 역시 논리학에 기대어 변증법의 역사적인 발전과 변증법이 가진 저력을 무시해 왔다. 

 하지만 변증법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헤겔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변증법이 가진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였다. '정 - 반 - 합'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내부에 들어 있는 요소를 부정하고 그 것을 다시 부정하여 진보된 합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정신사의 발달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바로 해겔이 말한 변증법이다.


공산당선언, 책세상, 2018.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헤겔의 변증법은 거꾸로 서 있다고 말한다. 이를 바로 세워야지만 진정한 변증법이 완성될 수 있음을 천명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헤겔의 변증법은 정신, 즉 형이상학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였다. 헤겔의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형이하학적인 논리로 끌어내려 인간 세상의 발전, 인간 세상의 진보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인 사관에 불을 지핀 것은 포이에바흐였다. 포이에바흐는 유물론의 세계를 탐색함으로써 신의 세계가 아닌 인간의 세계, 즉 사물의 세계를 탐구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 역시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 낸 하나의 가치 체계일 뿐이다. 

 하지만 포이어바흐 역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제시하며 신적인 세계관을 부정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신적인 세계관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완벽한 유물론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써서 그의 잘못된 유물 사관에 비판을 가한다.(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다음에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진정한 유물론, 그것도 유물론적 변증법(물론 마르크스가 이 유물론적 변증법을 명확하게 제시한 적은 없다. 다만 후대에 마르크스의 연구자들, 엥겔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연구자들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유물론적 내용이 들어 있기에 유물론적 변증법이라 명명했을 뿐이다.)의 세계에 대해 이 책에서 말한다.


 그리고 포이어바흐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인류 진보의 역사를 말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류는 변증법에 의해 발달해 왔다. 인류의 역사는 아주 쉬운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옆에 있는 그림이 마르크스가 역사에 부여한 유물론적인 변증법이다. 인류의 역사는 '정 - 반 - 합'의 관계에 의해서 끊임없이 진보한다. 

 원시 사회의 부정적인 부분이 나타나고 이러한 부정에 대한 부정을 통해 다시 합의 세계가 나타나 이 세계가 정이 된다. 원시 사회 다음에 온 봉건 사회를 원시 사회에 대한 부정의 부정에 의해 탄생한 합의 세계라고 말해도 좋을 듯 하다. 다음으로 봉건 사회 역시 부정적인 요소들이 꾸준히 축전된다. 그래서 반의 세계가 나타난다. 봉건 사회를 부정하는 세계가 그려지고, 이 세계에 대한 부정의 부정의 세계가 나타나 다시 합의 세계가 나타났다. 우리는 이를 시민사회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하자만 현재 시민 사회는 다양한 부정적인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민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축적되어 반의 세계가 정립되고, 부정의 부정에 의한 세계가 정립되었을 때, 도래하는 세계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세계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계라고 불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 사회가 최종 도달지점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계도 잠시 거쳐가는 시민 사회의 부정의 부정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자리 잡고 나면 역사는 다시 진보한다. 그것이 바로 코뮤니즘의 세상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코뮤니즘을 보여주면서 끝이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논리에 따르면 코뮤니즘의 사회 역시 부정적인 부분이 축적될 것이다. 즉, 부정의 부정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다. 코뮤니즘의 사회는 부르주아 사회와 달리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진보하면 진보했지, 후퇴하지는 않을 것이다.

 엥겔스 역시 변증법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획을 그은 부분이 있다. 엥겔스의 변증법을 우리는 자연변증법이라 부른다. 이전 신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에 자연은 그저 이용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자연과 공생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분명히 멸망하고 말 것이다. 현재 이상 기후가 나타나는 것도,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는 것도 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은 자연 상태로서 부정의 부정을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과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것이 엥겔스가 변증법을 대하는 자세이다. 마르크스가 죽고 마르크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엥겔스의 철학적 사상은 자연의 변증법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자연과 함께 발달한다면 과학은 경시되는가? 과학은 자연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다. 과학은 자연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달하고 있을 뿐이다. 어디에서? 바로 부르주아의 사회에서 말이다. 과학은 자연과 공생하는 쪽으로 발달할 수도 있다. 코뮤니스트들은 꼭 과학의 발달을 멈추고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사람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코뮤니스트들에게 있어서도 과학의 발달은 중요하다.

 과학이 발달해야 인간에게 더 좋은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과 더불어서 말이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보라. 인간은 게을러져야 한다. 그럼 무엇을 통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할까? 그것은 과학의 발달이다. 과학이 발달되어 인간의 일을 대신한다면 인간은 그 만큼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란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다가오는 세상에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개발하고, 인류의 공동적 운명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코뮤니스트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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