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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별에는 없는 이별 - 다시 시작된 세계

제5화 멧돼지 족(2)

by 김균탁commune
제5화 그림.png

멧돼지 족의 발자국은 깊은 산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호와 오후가 발자국을 따라 들어가자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흔적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쳐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희미하게 남은 냄새와 나무와 바위에 긁혀 있는 손톱자국이 끊어진 발자국을 놓치지 않게 연결해 주고 있었다.


성호와 오후는 조심히 흔적을 따라 이동했다. 언제, 어디서 멧돼지 족이 갑자기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성호와 오후는 멧돼지 족을 열심히 경계하면서 흔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한 가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랑이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호와 오후는 흔적에 정신이 팔려 태랑이가 쫓아오는 소리와 기를 느낄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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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랑이는 미르에게 잡혀 다시 수련장으로 왔다. 미르는 태랑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이 녀석이 자꾸 어른들을 속이고 수련을 게을리 할 거야? 빛의 아이면 빛의 아이답게 행동해야지. 수련을 더 열심히 해서 이 별이 멸망하는 것을 막아야 할 것 아니냐?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일족 족장님한테…….”


미르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수련이고 뭐고 없다. 오로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폭탄이다.


태랑이는 서둘러 미르의 잔소리를 막아야 했다.


“아! 미르 아저씨, 죄송해요. 변신술 다시 보여주세요.”


태랑이의 이야기에 미르는 잔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태랑이의 속셈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도 거북이를 보여달라는 거냐?”


태랑이는 자신의 꾀가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이번에도 미르를 거북이로 변신시키고 성호와 오후를 몰래 따라갈 생각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멧돼지 족, 그리고 어둠의 아이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태랑이는 멧돼지 족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써먹었던 방법이 또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랑이는 거북이로 변신한 미르가 쫓아오지 못하게 재빠르게 도망치고 말 것이다.


미르가 아무리 우직해도 멍청한 것은 아니었다. 태랑이의 꾀에 한 번 속아 넘어가지 같은 수법에 두 번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태랑이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수련할 때는 머리가 빠르게 안 돌아갔지만, 잔꾀를 부릴 때만큼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태랑이는 미르에게 말했다.


“맞아요. 거북이, 그런데 제가 먼저 변신해 볼게요. 그럼 둘 다 거북이로 변신하는 거니까. 느려서 제가 도망갈 일은 없겠죠?”


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럼 되겠구나. 어서 먼저 변신해 보거라.”


태랑이는 정신을 집중하고 거북이로 변신했다. 그런데 미르가 또 화를 냈다.


“이 녀석아, 온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냐? 네 모습을 봐라. 이게 거북이인지.”


태랑이는 자신의 모습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거북이 얼굴에 팔다리마저 등껍질로 쏙 들어갈 수 있도록 딱 알맞은 크기, 그리고 이번에는 꼬리까지 두툼한 거북이 꼬리였다.


태랑이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미르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거북이 모습이 완벽한데 무슨 말씀이세요? 봐요? 아무리 봐도 완벽한 거북이잖아요.”


미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태랑이의 발을 가리켰다.


“이 녀석아. 네 발을 봐라. 발을. 그게 거북이 발이냐? 돼지 발이지.”


태랑이는 그때서야 목을 길게 빼 가랑이 사이를 바라보았다. 정말 거북이 다리가 아니라 돼지 다리였다.


태랑이는 거북이 몸에 돼지 다리를 가진 괴상한 생물체가 되어 있었다. 태랑이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있잔하요. 변신술, 저는 왜 아무리 해도 안 될까요? 이번에는 분명히 온 정신을 집중했는데. 힝!”


“네 생각이 다른 곳에 있느니까. 그렇지. 이 녀석아.”


태랑이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태랑이 머릿 속에는 오로지 성호와 오후의 뒤를 몰래 쫓아가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러니 변신이 제대로 될 리가 절대 없었다. 태랑이는 미르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태랑이는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미르에게 말했다.


“미르 아저씨, 죄송해요. 다시 한 번만 보여주세요.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보고 제대로 변신할게요.”


미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거북이로 변한 태랑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은 안 보여 줄거야. 그리고 네가 정신 집중을 제대로 못해서 변신에 실패할 때마다 나도 성호처럼 꿀밤을 때릴 줄 알아라.”


말을 마친 미르가 정신을 집중하고 거북이로 변했다. 미르는 정말 완벽한 거북이의 모습이였다. 태랑이는 미르를 향해 감탄을 하며 말했다.


“역시 미르 아저씨는 멋있다니까요. 정말 완전한 거북이의 모습이예요.”


태랑이가 갑자기 칭찬을 하자 미르는 쑥스러운 듯 태랑이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자, 잘 봤지. 이렇게 온 정신을 집중해야지만 완벽히 변신에 성공할 수 있는 거야. 알겠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 집중, 너처럼 산만하면 계속 이상한 모습으로 변신하게 되는 거야.”


미르의 훈계가 끝나자마자 태랑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미르에게 말했다.

“네! 명심,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고 다음 수련 때에요.”


태랑이는 거북이로 변한 미르를 놔두고 쏜살같이 성호와 오후가 걸어간 방향으로 뛰어갔다.


미르가 태랑이의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녀석아. 너 또 어른을 속인거냐. 다음 수련에 정말 혹독하게 할 줄 알아.”


태랑이는 들은 척 만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 같이 성호와 오후가 걸어간 방향으로 뛰었다. 아마 따라 잡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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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와 오후는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긁힌 나무와 상처 난 바위를 보며 성호와 오후는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무와 바위에 난 흔적들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 말은 멧돼지 족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아니면 행동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흉폭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호와 오후는 아주 조심스럽게 흔적을 따라갔다.


그리고 성호와 오후의 뒤를 더 조심스럽게 태랑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흔적은 깊은 동굴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성호가 깊은 숨을 들이 마시며 말했다.


“피 냄새가 너무 진하게 나. 이 동굴이 틀림 없는 것 같아.”


오후도 숨을 들여 마셔 보았다. 성호의 말처럼 진한 피냄새가 동굴 안에서 풍겨 나왔다.


성호와 오후는 냄새에 아주 민감했다. 그래서 태랑이에게도 냄새 훈련을 자주 시키는 편이었다.


태랑이가 훈련을 조금만 더 열심히 해주면 좋으련만 매일 잔꾀만 부리고 연습에 소홀하니 성호도 오후도 하루하루 속이 터져니갈 지경이었다.


냄새를 맡고 있는 성호를 향해 오후가 말했다.


“이 안에 살아남은 멧돼지 족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이렇게 진한 피 냄새를 풍기다니. 희생자가 한둘이 아닌 것 같은데. 화족의 피 냄새와 일족의 피 냄새가 섞여 있어. 아마 산 근처에 있는 화족과 일족을 계속 습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오후의 말에 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 돌아가서 멧돼지 족을 찾았다고 족장님들께 말씀드리고 함께 올까? 아니면 우리가 멧돼지 족을 직접 만나볼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잖아. 그리고 우리가 보고하는 사이 멧돼지 족이 은신처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고. 그런데 성호 너 쫄았냐? 돌아가자고 말하고?”


“보고를 하자는 거지. 누가 쫄았다고 말했냐? 내가 너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냐?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넌 뒤에 따라오기나 해. 네 말대로 멧돼지 족이 은신처를 옮기면 또 찾는 데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니 우리가 만나보자.”


성호는 앞장 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는 뒤를 따라 들어가며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 남겨진 흔적으로 봐서는 공격성이 강할지도 모르겠어. 어둠 속이니까 언제 어디서 공격해 올지 모르니까. 천천히 움직이자고.”


“그래, 알았다. 너도 조심해서 움직여. 예전 책을 보면 멧돼지 족이 모든 종족들 중에서 가장 성격이 난폭하다고 나와 있었으니까.”


“그래. 어두우니까 앞장이나 잘 서. 너무 빨리 들어가서 서로 멀어지지 말고.”


성호와 오후는 매일 티격태격 싸워도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둘은 어릴 때부터 만나면 싸웠다. 그리고 싸우면서 들어버린 정이기에 더욱 돈돈했다.


그러니까 사실 둘은 매일 싸우는 형제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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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와 오후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태랑이는 동굴 앞에서 망설였다.


무척이나 어둡고 긴 동굴 같아 보였다.


보이지 않는 동굴을 따라 들어가다가 성호와 오후를 놓쳐버리면 그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동굴 안에서 헤매게 될 걸 생각하니 태랑이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성호와 오후의 뒤만 놓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성호와 오후에게 너무 접근하게 되면 둘에게 들켜 며칠 동안이나 혼나야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태랑이는 생각했다.


‘뒤를 따라가다 걸리게 되면 혼나면 그만이지, 뭐. 멧돼지 족과 어둠의 아이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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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가 동굴을 걸어가며 동굴 벽을 짚어 보았다. 멧돼지 족이 남긴 발톱의 흔적이 동굴 벽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성호가 짚은 곳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성호는 오후를 불렀다.


“오후야, 여기 좀 봐봐.”


오후는 성호가 가리키는 곳을 보며 말했다.


“이건? 혹시?”


성호는 오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어둠의 상흔. 여기 어둠의 상흔이 있다는 말은 어둠의 아이와 멧돼지 족이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일 거야.”


오후도 성호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의 상흔은 한두 군데에 남겨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벽을 따라 들어가며 여기저기 어둠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성호와 오후는 어둠의 상흔을 따라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태랑이도 둘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갔다.


동굴의 끝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시커멓고 커다란 그림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성호와 오후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고 들려오는 말에 귀를 귀울였다.


“빛의 아이, 어둠의 아이님이 말씀하셨다. 빛의 아이, 빛의 아이가 우리 종족을 모두 죽여버렸다고. 그러니 빛의 아이를 죽여야만 한다. 꼭 복수해야만 한다. 우리 일족을 몰살시킨 빛의 아이, 그리고 여섯 종족 모두를 없애야만 한다. 어둠의 아이님이 말씀하셨다. …….”


몸을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그림자는 멧돼지 족이 분명했다. 그런데 멧돼지 족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빛의 아이, 그러니까 태랑이가 자신의 종족을 몰살시켰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더 나아가 여섯 종족과 멧돼지 종족이 마치 전쟁을 치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그림자,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여러 종족이 평화롭게 지내던 그 시절을 되찾아야만 했다.


완전히 멸족한 줄 알았던 멧돼지 족이 다시 나타났다. 성호와 오후는 멧돼지 족을 설득해 다시 천오백 년 전의 평화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성호가 천천히 어두운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성호의 발자국 소리에도 멧돼지 족은 성호가 걸오는 방향을 바라보지 않았다.


몸을 움크리고 오직 한 가지 말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빛의 아이……, 우리 종족의 원수. 빛의 아이……, 우리 종족의 영원한 원수.”


성호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움크리고 있는 멧돼지 족의 말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빛의 아이에 대한 오해. 성호는 어떻게 해서든 그 오해를 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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