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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 철학기행

7화 — 불빛의 주인들

by bonfire

7화 — 불빛의 주인들

우리는 며칠을 더 걸었다.
나는 여전히 몸이 온전치 않았고, 상처는 자꾸 덧나 피가 스며나왔다.
그러나 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내가 주저앉을 때마다 끌어당기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산등성이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한 줄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
그것은 오래 잊고 지낸 문명의 흔적 같았다.
아이의 눈이 환해졌다.
“사람들이에요. 살아 있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불빛은 희망이자 동시에 위험이었다.
사람이 모인 곳엔 늘 규칙이 있었고, 그 규칙은 대개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켰다.

우리는 결국 불빛을 향해 나아갔다.
낡은 아파트 단지를 개조한 듯한 거처였다.
벽은 판자로 보강되어 있었고, 출입구에는 철문이 달려 있었다.
문 앞에는 무장한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우리를 낯선 짐승 보듯 살폈다.

“정체는?”
낡은 소총을 든 사내가 물었다.
나는 상처투성이 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길을 지나던 자다. 아이와 함께다. 며칠만 쉴 곳을 찾고 있다.”

그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냄새가 퍼졌다.
불 위에서 무언가가 끓고 있었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우리가… 살았어요.”

그러나 나는 그 순간부터 불안했다.
이곳은 분명 질서를 세우고 있었고, 질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대가가 있었다.

우리 앞에 중년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오래 전 교사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여긴 우리가 만든 작은 공동체야. 서로 돕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지.
하지만 규칙이 있어. 들어오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가지?”

그녀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내 상처난 몸을 눈길로 훑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할 수 있는 사람만 음식을 받을 수 있어. 아이는 아직 작다. 부담만 될 뿐이지.”

아이의 손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내 몫을 줄이겠다. 아이에게도 음식을 달라.”

그러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규칙을 어기는 거야. 규칙을 어기면 모두가 무너진다.
우린 이미 많은 걸 잃었어.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릴 수 없어.”

순간, 나의 안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다.
여기서 맞선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아이는 굶어 죽을 것이다.

나는 아이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무슨 결정을 내릴지, 그 눈은 묻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일하겠다. 내 몫까지 아이에게 주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아이만은 굶기지 말아달라.”

여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 밤만은 허락하지. 하지만 내일부터는 규칙에 따르도록 해.”

아이의 어깨가 풀리며 안도했다.
나는 그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이곳이 희망일지, 새로운 지옥일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또다시 선택의 순간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사실이었다.

밤이 깊었다.
사람들은 서로 기대어 잠들었지만,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아이의 숨결이 곁에서 잔잔히 들려왔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 공동체란 무엇인가?
개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답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내 안의 불안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계속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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