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내 직장 생활 두 번째 이야기를 진급으로 정했다. 15년 전쯤 일이라 중간에 심하게 끊긴 기억들 뿐인데,
일기 감겨 있음에 스스로 감사한다.
회사마다 진급 규정은 다르지만, 이 회사는 학부를 졸업한 직원은 4년,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인원은 2년 후에 진급 자격이 주어진다. 내 경우엔 대학원까지 마치고 입사를 했으니, 2년간의 평가를 통해 진급이 결정된다. 같은 해에 진급 대상이라면 아무래도 정해진 TO 내에서는 4년간 기여를 한 인원들이
진급의 가능성은 더 높다고 봤다. 여기서 대리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총 5가지의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
지금 생각하면 고작 대리 진급에 너무 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요즘은 기간만 채우면 자동 진급이라니,
이건 뭐…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1. 인사평가
직장인들에게 인사 고과는 일 년 농사의 결실이다. 받는 돈과 본인 이미지와 직결되어 있어서 잡음도 많고,
종종 발표 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회사는 최대한 '공정'과 ‘관객성‘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 그렇게 운영하고자 노력은 하나 이 역시 사람의 일이다. 특히 진급에 있어서 인사 고과가 미치는 영향은 단연 으뜸이다. 당시 기준으로 60프로가 반영되었으니, 대부분은 고과에서 당락이 갈린다.
#2. 어학
회사들이 대부분 글로벌화를 고려해서인지 어학 점수를 입사 때부터 적용하고 있다. 토익, 토플, 영어스피킹의 영어와 JPT의 일본어, HSK나 TSC의 중국어가 있다.
다양한 언어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도 되지만, 역시나 기본은 영어다. 회사마다 기준은 다르나 가산점과
일정 점수 이상에서는 면제 수준을 상정해 놓고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내 영어 실력으로는 그냥 남의 나라 얘기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이라고 크게 나아졌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여하튼 당시 내 목표는 토익 기준으로 760점을 넘겨 진급 환산 점수로 8점을 받는 것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나 입사하는 친구들이 보면 웃을 만한 점수지만, 적어도 내게는 찍은 게 좀 맞아줘야 가능한 점수였다.
#3. 직무기술시험
기술을 개발하는 엔지니어로서 전공 분야나 직접 진행하고 있는 분야를 포함하여 사내 기술 전반에 대한
필기시험이다. 출제 범위가 넓기도 하거니와 학창 시절처럼 참고서나 과년도 시험의 족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나 쉽지 않은 시험이다. 객관식이면 찍기라도 해서 요행을 바라겠으나, 주관식 문제도 포함되어 있으니 제대로 된 공부 없이는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시험이다.
4. 특허 & 발표
우선 입사 후 출원된 특허나 출원 진행 건이 최소 1건 이상은 있어야 했다. 신입 사원들은 기술적인 부분이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선배들이 도움을 주긴 했다.
그러나, 특허를 쓰는 것이 끝이 아니다. 본인이 출원한 특허에 대해 기술적인 부분을 강조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 물론 출원하지 못한 진급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본인이 입사 후 진행했던 일을 기술 세미나처럼 발표하게 하였다. 업무에 따라 출원이 어려울 수도 있으니 형평성을 고려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요즘도 그렇
지만 특히 초년생들의 특허 쓰기는 쉽지 않다.
심사 위원은 담당(Devision, 팀 상위부서장)과 그 조직의 팀장들(Team leader)로 보통 4~5명이고, 지원자가 속한 팀장이 채점한 점수는 카운트에서 제외된다. 나름 공정성을 기하려는 조치인 듯싶다.
5. 식스스그마
일반인들에겐 낯선 용어다. ‘6 sigma’는 품질 관리를 위한 기법인데 당시에 GE(제네럴일렉트로닉스) 같은 세계적 기업들의 품질 관리 시스템을 따라 하는 때라 회사에서는 무조건으로 시켰다. GB, BB, MBB의 등급이 있었고, 첫 단계인 GB 등급 취득이 대리 진급의 필수 기준이었다. 그냥 공부해서 시험을 치르는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시간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통계적인 실험 절차와 분석을 통한 프로젝트를 수행한 후에나
시험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도 프로젝트를 두 개나……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심사 자격이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었다.
이 모든 심사의 과정이 진급 대상자가 선정된 후 1,2월 두 간 진행되었다.
이렇게 5가지 자격과 기준에서 취합된 총점을 가지고 대리 진급의 당락이 결정된다. 심하다 싶었지만, 밀리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아껴서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입사 후 일 년 만에 결혼한 나로서는 주말이면 다시 학생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다.
진급해서 월급도 오르고 호칭도 변경되는 것도 중요했지만, 누락되는 상황을 도저히 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3월이 되니 날마다 술을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