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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칼라파테] EP02. 푸른색의 빙하

페리토 모레노

by 임지훈

[푸른빛의 빙하]

20240310_154949.jpg 배에서 바라본 페리토모레노 빙하

어제 피츠로이 정상에 올라가고도 봉우리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오늘은 엘 칼라파테에서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기로 한 날. 엘찰텐 못지않게 이곳도 날씨가 오락가락하다고 해서 걱정이 됐지만, 기대감을 품고 여행에 나섰다.


이곳에 오면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빙하 위를 직접 걷는 트레킹을 한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기본 코스가 40만 원, 조금 더 긴 코스는 70만 원이나 했다. 여행 예산을 고려하면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금액이었다. 입장권만 구매 후 그냥 길을 따라 걸으며 빙하를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냥 걷는 것만으로는 아쉬워 대신 비교적 저렴한 보트 투어를 하기로 했다. 빙하를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보트가 출발하고 3분 정도 지나자 웅장한 빙하가 눈앞에 나타났다. 예상과 달리 빙하는 순백색이 아닌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중간중간 보랏빛이 어우러져 마치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빙하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빙하 앞에 다가가자 기온이 확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어, 추워" 하고 말이 나왔다. 그때 옆에 있던 백인 여성이 내 말을 따라 하듯 "어, 추워"라고 하는 게 아닌가. 순간 '엥?'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한 한국어라 따라 한 건가?, 아니면 한류의 영향으로 배운 한국어?

그런데 그 여성이 또렷한 한국어로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다. 놀라서 어떻게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냐고 물었더니, 수원의 한 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캐롤라인. 여중에서 일할 때 겨울이면 학생들이 버스를 기다리며 "어, 추워"라고 하던 게 기억에 남아 따라 해 봤다고 했다.


파타고니아의 빙하 앞에서 만난 한국과의 인연. 캐롤라인과 한국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하다 보니 빙하의 차가운 기운도 잊을 정도였다.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지만, 이 우연한 만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때로는 이런 게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웅장한 자연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반가운 인연도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일본인 친구와 저녁을]

20240311_085020.jpg 내가 묵은 숙소. 넓은 통창이 인상적이다

보트투어를 다녀오니 이른 저녁을 먹을 정도의 시간이었다. 미리 마트에서 장을 봐온 소고기와 쌀, 그리고 와인을 곁들여 한 끼를 해결하기로 했다.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에 들어오니 아시아인 한 명이 이미 요리를 하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우리는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은 채, 각자의 요리를 시작했다. "혹시 이 가스레인지 쓰는 방법 알아?" 긴 침묵을 깨고 이 친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몇 번이고 가스레인지 사용을 시도해 봤는데 가스불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나는 이미 이 주방을 몇 번 사용해 봤으니 어렵지 않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자 이렇게 돌리면 돼. 근데 어느 나라 사람이야?" "어 고마워. 난 일본 사람이야. 너는?" "난 한국인. 이렇게 된 거 밥이나 같이 먹을래? 나 와인도 있어."


갑작스러운 저녁번개에 흔쾌히 응한 이 친구는 본인의 이름을 '나오야'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내가 가져온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이 친구도 술을 마시자 텐션이 조금 올라왔는지 어색함이 사라진채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서로서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콘텐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오야는 '이태원클라쓰'를 재밌게 봤고, 아직도 카라의 노래를 즐겨 듣는다는 이야기. 나는 오타니가 LA다저스에서 얼마나 잘할지 기대가 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밤새 떠들었다.



[아무것도 안 한 날]

20240312_120927.jpg 엘칼라파테의 명물 아사도

다음날 아침. 원래는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당일치기 투어를 하려 했지만, 이틀 연속으로 새벽기상을 한 탓에 하루는 쉬어가는 날로 결정했다. 대신 엘칼라파테 시내에 나가 스파와 식도락 나들이를 즐기고 오기로 결정했다.


20240312_122251.jpg 아사도

이곳 엘칼라파테에 오면 꼭 먹어보는 음식 중 하나가 아사도이다. 시내에서 얼마 걷지 않자 압도적인 비주얼의 식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를 양쪽으로 펼친 후 숯불에 조리하고 있는 모습에, 홀린 듯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사도를 주문하고는 평소의 스테이크와는 어떻게 다를지 기대를 하며 아사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릴 위에 갈빗살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은 비주얼부터 일반 스테이크와는 달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먹은 초리조 스테이크는 소고기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면, 아사도는 소금으로만 간이 된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숯불에서 직접 구운 덕에 스모키 향이 일품이었고, 계속 먹어도 물리지 않는 특유의 이끌림이 있었다.


20240311_141052.jpg 엘칼라파테 호텔에 있는 스파

아사도를 즐긴 후에는 스파에 들려 여독을 풀어주었다. 원래도 물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여행 중 쌓인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스파는 더욱 반가웠다. 간만에 만난 물이라 그런지 이용시간 2시간을 꽉 채워 이용했다.


마사지욕조에 앉아 뭉친 등을 풀어주다가 이곳과 연결되어 있는 수영장으로 이동해 물놀이를 즐기기를 반복하며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었다. 물에 뜬 채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 나도 모르게 몽롱해지는 느낌이 언제나 일품이다. 간혹 이런 느낌이 들 때면 전생에 물고기가 아니었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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