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엘칼라파테] EP01. 얼음의 땅, 파타고니아

어디 있니 피츠로이?

by 임지훈

[빙하의 도시]

20240308_192032.jpg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 파타고니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타고니아 지역 중 한 곳인 엘칼라파테로 향했다. 엘칼라파테의 도시 분위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와는 무척이나 달랐다. 개발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태초의 자연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고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분명 계절상으로는 여름이었지만 아침 기온은 6°C. 더운 곳에 있다가 와서 그런지 체감온도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이곳은 그대로 보존된 자연과 추위로도 유명하지만 남미스럽지 않은 물가로도 유명했다. 워낙 동떨어진 위치 때문에 물자수송이 어려워 물가가 꽤나 비싼 편이었다. 유일하게 저렴한 건 역시 소고기


엘칼라파테를 찾는 여행자들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빙하로 알려진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기 위해 오는 여행자들이 많다. 눈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빙하 위를 걸어보는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가격은 최대 70만 원. 이곳의 추위보다 더 살벌한 가격이었다.



[어디 있니 피츠로이]

20240309_111032.jpg 엘찰텐

빙하를 보러 가는 것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피츠로이가 있는 엘찰텐을 다녀오기로 했다. 의류 브랜드 파타고니아 로고에 박혀있는 3개의 봉우리가 바로 이곳 피츠로이이다.


이곳의 날씨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편이다. 아침까지 맑다가도 10분 만에 비가 오고 다시 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날씨가 반복되었다. 하필 내가 머무는 이 기간 내내 엘찰텐에 비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내심 불안했지만 비 예보에 가지 않는다면 더욱 후회할 것 같기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20240309_122019.jpg
20240309_124129.jpg
정상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좌) 아직까지는 맑은 날씨의 피츠로이 산행로(우)

피츠로이의 날씨는 비예보와는 달리 맑은 편이었다. 구름은 조금 있지만 하늘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꽤나 순조로운 트래킹이 될 것 같았다. 피츠로이의 시작은 매우 순조로웠다. 보통 왕복 8시간 정도 트래킹을 한다 했지만 이 정도 난이도로만 계속된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산행을 하는 중간중간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었다. 1km마다 표지판이 길을 알려주고 있어, 대충 어느 정도 왔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표지판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제야 4km 정도 왔다고?' 한숨을 내쉬며 얼른 다음 표지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Hola(올라, 안녕) 이미 새벽부터 등산을 마치고 오는 사람들은, 산을 오르고 있는 내게 인사를 건네주었다. 파이팅 하라는 응원으로 들리는 인사말에 나도 Gracias(그라시아스, 고마워)로 응답하며 산행을 이어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인사를 건네주는 남미 사람들의 밝은 분위기가 에너지를 불어넣어줬다.


"어휴 한국인이에요? 고생하네" 뒤이어 산에서 내려오던 한국인 어머니들을 마주했다. "벌써 내려가시는 거예요?" "그럼 우린 새벽에 진작 다녀왔지!" 역시 한국의 어머니들. 이렇게 부지런하다니


20240309_142240.jpg
스크린샷 2024-10-09 181219.png
절망적인 날씨의 피츠로이. 원래는 이렇게 맑은곳인데... (우측 사진 출처: walkpatagonia.com)

7km쯤 올라왔을까? 갑자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풀숲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심 속으론 불안했지만 정상에 갔을 때는 맑은 봉우리가 맞이해 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트래킹을 이어갔다.


9km에 도달하자 빗줄기는 어느새 눈이 되어 뿌렸다. 설상가상으로 남은 1km의 길은 도저히 오르기 힘들 정도의 등산로였다. 길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바위덩어리들을 잡고 올라가야 했고, 각도도 거의 60도는 되는 느낌이었다. 등산화에 등산스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바람에 휘청거릴 정도로 매서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저런 장비를 착용한 사람들도 힘들어하는데, 아무런 장비도 없이 바람막이에 운동화로 이 길을 오르는 건 쉽지 않았다.


"드디어 정상이다!" 숨을 헐떡이며 오른 정상에서는 내가 아는 피츠로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피츠로이를 딱 가릴 정도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나를 약 올리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먼저 온듯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물었더니 "한 시간짼데 계속 저래. 날씨가 안 좋네" '이런....'


20240309_170834.jpg 정상에서 내려오자 약 올리듯이 날씨가 맑아지고 무지개가 떴다.

10분을 기다렸지만 구름은 더욱 두꺼워지고 봉우리를 볼 희망은 더욱 사라졌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졌고 얼른 나를 내려보내려는 듯 몰아쳤다. 계속해서 기다려도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 없는 피츠로이에 결국 무릎 꿇고 말았다.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가기로 했다. 이런 아쉬움이 다음에 또 오게 만드는 계기가 되겠지.


등산을 하며 에너지를 몰아 썼는지 내려가는 길은 더욱 힘들었다. 다리는 이미 풀릴 대로 풀려 있었고, 눈보라 때문에 길을 미끄러웠다. 그래도 내려가서 따뜻한 음식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하산했다.


마을에 거의 도착할 때쯤 되자 귀신같이 날씨가 맑아지고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를 보면 반가운 마음이 컸지만 이 날의 무지개만큼은 나를 약 올리려는 하늘의 장난 같았다. '조금만 일찍 맑아지지...'



keyword
이전 17화[부에노스 아이레스] EP02. 탱고, 애환의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