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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슈하 Oct 18. 2024

국민육아템이 없는데요

잠깐 써보긴 했어요, 잠깐...

"첫째 아이 키우면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집 처음이에요!"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맞이한 첫 번째 월요일. 오전 8시 반이 좀 넘어서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집으로 방문을 했다. 출근을 하신 건 이모님이었는데 내가 왜 이리 떨리는 건지. 이모님, 제가요, 아무것도 준비를 못하고 애를 낳으러 가서요. 혹시 뭐가 필요할까요? 이모님은 한번 슥 둘러보시더니 작은 젖병 몇 개, 큰 젖병 몇 개. 요것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역시 베테랑! 나는 바로 척척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다. 이 분야에선, 나도 베테랑! 엣헴.


급하게 산 젖병소독기는 집으로 배송 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중고로 사도 되는 것이었는데 너무 급하게 마련하려다 보니 그냥 새 상품 사는 게 빨랐다. 사실 젖병소독기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조리원에 있을 때 남편이 자동차 정비소에 다녀오더니 '젖병소독기는 사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연유를 들어보니, 자동차 정비소에 예약한 시간에 맞춰 갔는데 어떤 사람이 급하게 먼저 방문해서 차량 정비를 받는 바람에 조금 기다려야 했단다. 시간적으로 급할 게 없어서 먼저 천천히 끝내시라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 차주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더란다. 보통 계획한 일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싫어하고,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어하는 남편인데 어쩌다가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단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 곧 아기가 태어날 거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 남자가 '젖병 소독기 꼭 사세요!'라고 했다는데, 귀인이 나타나서 계시를 해 주는 느낌이었다나. 그 촉을 무시할 수 없어서 젖병소독기는 새로 샀다.


아무튼 이렇게 젖병, 젖병솔, 젖병소독기. 임신 기간에 홈쇼핑을 보고 홀린 듯이 구매한 찻물 끓이는 유리포트. 이거 말고는 딱히 무얼 더 산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초보엄마이기도 한 내가 "육아는 템빨"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우리 집 거실은... 너무 작았다! 가로 280센티, 350센티. 아마 국민 000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들을 전부 구입했다간 청소할 때마다 테트리스도 함께 해야 할 판. 최대한 집의 지형지물을 살려 아기의 공간을 마련해 보기로 했다.



✔️ 기저귀 보관함

기저귀보관용으로 산다는 트롤리는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쓰기 좋다고 하는데, 우리 집 거실에서 안방까지는 고작 다섯 발자국 밖에 되지 않았다. 옷장 안에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하얀 바구니가 '나야, 바구니.' 하고 말을 걸어오길래 당장에 꺼내와 기저귀를 담았다. 거실엔 사이즈가 넉넉한 바구니를, 자는 방엔 조그마한 바구니를 두었더니 아주 딱 맞았다. 기저귀, 손수건, 로션처럼 매일 쓰는 것만 바구니에 담고 면봉, 체온계, 손톱깎이같이 매일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약상자에 보관했다.



✔️ 아기침대

트롤리를 놓기에도 부족한 사이즈의 거실이었으니, 아기침대를 둘 만한 공간이 없는 건 당연지사. 시댁에서 안 쓰신다는 토퍼가 있길래 미리 받아놨다. 방수커버와 스프레드를 깔아 그 위에서 잠도 자고, 기저귀도 갈고, 놀이도 했다. 뒤집기, 배밀기, 기기연습 모두 이 토퍼 위에서 이루어졌다. 등쿠션을 함께 두니 좌식소파의 역할까지 해냈다. 역시 작은집엔 올인원이 최고다.



✔️ 아기 옷장

우리 집엔 붙박이장이 2개 있었는데, 붙박이장 옆으로 선반이 달려 있었다. 칸을 하나 빼서 압축봉을 달고 아기옷걸이에 옷들을 전부 걸어두었다. 아기 내복은 유색으로 사면 외출할 때 입어도 내복바람으로 외출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실내복과 실외복을 구분해서 두는 대신에 입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을 디자인의 내복만 사서 입혔더니 옷가지 수를 줄여도 문제없었다. 양말이나 외출용 액세서리는 옷 밑에 두었다.



✔️ 장난감 보관함

부동산 사정이 이러하니 국민 장난감 서랍함도 둘 데가 없었다. 마침 아기 태어나기 전에 미니멀라이프한다고 안 쓰는 부엌살림을 많이 배워냈던 터라 주방 서랍은 비어있는 상태. 그래서 그냥 주방 서랍에 장난감을 넣었다. 주방의 모든 가구에는 잠금장치를 하지 않고, 대신에 냄비, 작은 프라이팬, 실리콘 뒤집개 등을 아이 손 닿는 곳에 두어서 마음껏 갖고 놀도록 했다. 식사준비시간이 되면 아이와 서로 냄비를 쓰겠다고 실랑이하는 일도 한 번씩 있긴 했지만...



✔️ 대형 장난감, 울타리

이미 집 전체가 아이의 놀이터가 되었으니 울타리를 굳이 둘 필요는 없었다. 친척분이 오래된 쏘서를 물려주셔서 설치해 봤는데, 집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는 생활을 일찍부터 한 아기는 그 안에 들어가면 답답한지 울어대기만 했다. 잘 쓰지도 않는데 거실의 1/8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답답하여, 설치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냥 치우기로 했다. 첫째 키우면서 잘 쓴 대형장난감은 모빌(뒤집기 하고 바로 처분)과 아기체육관(일어서면서 바로 처분) 정도였다.






작은 집에서 아기를 키울 때는 정말 자괴감에 빠지기가 쉽다. 안 그래도 힘든데 공간까지 숨을 조여 오는 느낌이랄까. 이럴 때는 육아템을 많이 둔다고 해도 구세주 역할을 해 주지 않는다. 청소할 때 걸리적거리기만 한다. 바닥에는 웬만하면 물건을 두지 말고, 가구도 웬만하면 두지 말고 그냥 최대한 빈 공간에 아기와 대자로 누워있는 게 최고다. 장난감도 너무 많을 필요가 없다. 아기가 장난감을 흩뿌려 놔도 내가 열받지 않을 정도로만 두자. 아기에게 최고의 장난감은 화내지 않는 엄마다. 국민템은, <없어도 그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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