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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슈하 Oct 11. 2024

출산가방이 없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있기는 한데...

첫째의 탄생은 사고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날은 그냥 막달 진료를 하고 매콤한 카레우동이나 먹으러 갈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예정일까지는 한 달 조금 더 남아있었다. 당시 우리 집엔 친구들이 선물해 준 아기손수건 스무 장과 속싸개 두 장, 배냇저고리 두 장이 세탁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다른 임신부들은 이맘때쯤 손수건 빨래도 하고, 배냇저고리 세탁도 하고, 젖병 소독도 한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젖병과 젖병소독기는 있지도 않았다. 젖병 설거지? 생각만 해도 너무 귀찮으니 나는 꼭 모유수유를 해야지. 고 정도 마음가짐까지가 해 둔 출산준비의 전부였다.


당시의 내 몸상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임신 초중기 넘어가서 안정기가 되는 시점에 자꾸 피가 보여서 병원에 가 보니 경부에 폴립이 있다고 했다. 그냥 두어도 상관은 없지만 점점 출혈이 심해지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거를 하는 게 낫다고 했다. 완전히 안정기에 접어드는 임신 중기시기에 수술을 했고,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이에 신혼집 이사를 했다. 폴립 사이즈가 제법 컸기 때문에 맥도날드 수술을 함께 진행했다. (햄버거 말고 그 이름을 또 쓰는 유명한 분이 있을 줄이야) 맥도날드 수술은 보통 임신 중 경부 길이가 짧아진 산모를 대상으로 하는 수술인데, 나의 경우 경부길이에는 이상이 없으나 제법 큰 사이즈의 폴립을 제거하면 텅 빈 공간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수술하는 게 좋겠다고 선생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수술의 최종 경과를 보는 날이 그날이었는데.



"자궁문이 열렸는데요."



라니. 오... 선생님? 저 아직 손수건도 안 빨았는데요. 하지만 뱃속의 아기에게 손수건은 세탁해 놨는지 아기침대는 잘 세팅해 놨는지 엄마의 사정이 뭐가 중요할 것이란 말인가. 바로 분만실로 들어갔다. 결국 저녁식사로 매콤카레우동대신 금식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문 꽝 닫고 방에 들어가는 사춘기 아들의 뒤통수가 갑자기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벌써부터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야. 결국 그대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아직 산모는 아니니 4인실로 배정받았고, 남편은 있을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갔다(출근해야지...).


갑작스러운 입원이 아주 당황스러웠다. 나름 계획형 인간이라고 자부하던 나인데. 이제 매콤카레우동이나 손수건 세탁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이 집에서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 수건, 로션 정도만 아기 태어나면 기저귀가방으로 쓰라고 아빠가 사준 쇼퍼백에 담아왔다. 입원기간이 길어지자 비누도 하나 챙겨 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나의 출산가방이 되었다.


그 때 그 가방






덕분에 조리원에도 예상보다 3주 빨리 들어가게 되었다. 빈 방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드는 방이 있어서 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제왕절개 수술 부위가 너무 아파서 눕는 것도 미니멀해야 했다. 누워서 뒹굴거리는 시간이 없으니 살살 걸어 다니면서 심심할 때마다 방 정리를 했다. 갈아입을 조리원복을 개 놓고, 유축기와 젖병은 줄을 맞춰 세워놓았다. 병원 퇴원 선물로 받은 물티슈는 생각보다 쓸 일이 없어서 옷장에 넣어두었다. 화장품은 로션 하나 립밤 하나뿐이니 화장대는 어질러질 일이 없었다. 욕실에는 비누하나와 산모패드가 전부였다. 산모패드는 전부 조리원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신생아실에 다녀오면 한 묶음씩 가져올 수 있었다. (보통 입는 생리대나 개별 산모패드를 싸간다는 사실을 둘째 낳을 때 돼서야 알았다)


그렇게 정리정돈을 유일한 취미로 삼아 지내던 어느 날. 조리원 실장님이 똑똑 노크하고 방에 들어오더니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 조리원이 만실이라 조리원 투어를 하러 오는 손님에게 보여줄 방이 없어서 고민인데(참고로 팬데믹 한참 전이었고, 이 때는 조리원 투어를 하면 방을 구경할 수 있었다)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이 하나같이 내 방이 제일 깨끗했다고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신생아실이나 마사지 가서 방에 없는 것이 확인될 때만 다른 손님들이 오면 방을 보여줘도 되냐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예정보다 일찍 조리원에 들어와서 제일 좋은 위치의 방을 차지한 것에 대해 마음 한쪽에 부채 같은 것이 있었던 터라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 방을 몇 팀이나 보고 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퇴실하던 날, 조리원 실장님이 다시 한번 나와 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다른 산모들이 들고 가는 퇴원선물보다 한 보따리를 더 챙겨주셨다. 덕분에 수유패드니, 모유저장팩이니 하는 것들을 사지 않아도 되었더랬다. "젖병 하나만 더 챙겨주시면 안돼요?" "아휴 그럼요." 그린맘 젖병 하나 더 받아왔다. 헤헤.


그런데 다른 산모들은 핫딜을 통해서라도 산다는 그 수유패드, 모유저장팩, 물티슈 등등을 나는 별로 쓰지 않았다는 게 함정. 하다 하다 모유 양까지 미니멀할 줄이야. 수유패드는 뜯지도 않은 채 전부 당근으로 무료 나눔 되어 나갔다. 모유저장팩은 이유식 할 때 육수 담는 용도로 많이 쓴다는데, 나는 육수 내는 것도 미니멀하게 진행했으므로 이 또한 쓸 일이 없었다.




첫째가 6살이 되던 해 늦은 여름, 둘째 탄생을 앞두고 나는 다시 출산가방을 꾸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남들은 출산가방에 뭐뭐 싸가는지 공부 좀 해볼까, 유튜브를 틀었는데 오잉? 다들 캐리어를 꺼내는 것이었다. 심지어 <미니멀> 출산가방이라고 하는 분들도 기내용 캐리어를 꺼냈다. 몇 달 전에 아기를 출산한 친구에게 "아니 애기 낳으러 가는데 다들 캐리어를 꺼내더라? 기내용 캐리어 꺼내는 사람이 제일 짐 적게 싸가는 사람이었어!" 하니까 친구 왈. 어떻게 기내용 캐리어만 가져갈 수 있냐고 한다.


결국 나는 둘째 아이 출산가방으로 레디백을 챙겨갔다. 맥주 사은품으로 받은 거라, 산모랑 어울려서 제법 흡족했다.


둘째아이의 출산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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