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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슈하 Nov 01. 2024

여행가방을 비우다

최소한의 짐으로 떠나보자

백일기념 촬영은 집에서, 백일잔치 대신 집 앞 음식점에서. 아기는 저를 보러 온 어른들에 둘러싸여 음식점에서 쿨쿨 낮잠을 잘도 잤다. 이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남편과 나는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실행하기로 한다. 바로 100일 기념 여행을 가는 것. 그렇게 백일 조금 지난 아기와 사진관 대신 평창을 가게 되었다.


아기와의 긴 외출이 처음이었던 지라, 집에 있는 살림을 고대로 트렁크에 넣었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라 남편과 나의 여분옷은 에코백 하나 분량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출발 준비를 다 하고 나니 남편은 이미 땀범벅. 트렁크는 물론이고 조수석까지 짐으로 가득 찼다. 분유도 소분 없이 본품을 다 가져갔고, 전기포트, 좁쌀이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기띠와 여행 직전 급하게 산 중고 유모차, 젖병 말릴 때 쓰겠다고 쟁반, 낯선 곳에 적응 못할까 봐 헝겊책, 속싸개, 이불, 베개까지... 이사가 따로 없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짐을 푸르는데 트렁크까지 세 번은 왔다간 것 같다. "우리... 여행 온 거 맞지?" 극기훈련 아니지?" 나는 남편에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짐을 다 풀러 놓고 보니 단정했던 호텔방은 그야말로 폭격 맞은 것 같았다.


흘러내린 땀을 닦고 바로 저녁밥을 먹으러 나갔다. 그런데 세상에, 평창의 밤 날씨는 대륙 내부와 정말 딴판이었다. 분명 출발할 때는 여름과도 같은 날씨였는데. 여기는 초겨울날씨였던 것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가져온 아기 옷을 전부 꺼내다가 겹겹이 입혔다. 5월에 태어나서 아기 긴바지를 아직 사지도 못했는데 긴바지 생각이 절실했다. 긴 양말에, 가져온 담요를 전부 뚤뚤 두르고 났더니 이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기와의 여행이란... 추위를 잊게 하는 것일까?

낑깡 100일, 평창 1박2일


짐을 한 사바리 싣는다 내린다 고생고생했는데 아이와 한 첫 여행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밥도 좀 허겁지겁 먹어야 했고, 한 밤의 맥주타임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고, 큰맘 먹고 찾아간 목장 문 앞에서 안 되겠다 싶어 차를 돌렸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그래, 일상을 벗어난다는 게 이런 것이었다. 낯선 곳에서 밥을 먹고, 낯선 곳에서 잠드는 것. 맨날 보는 15평짜리 집 바깥으로는 참으로 넓은 세상이 있었다.


그래서 아기가 5개월쯤 되었을 때, 이번에는 해외여행을 시도해 보았다. 백일사진을 찍었던 그 카메라로 여권사진을 찍었다. 목적지는 마카오였다.




아기가 5개월이 되던 두 번째 여행에는 새로운 육아템이 생겨났다. 쟁반이 영 불편했던 터라 여행용 접이식 젖병건조대를 구매해서 가져갔다. 분유는 액상분유로 끼니 수를 계산해서 들고 갔다. 낑깡이는 아무 액상분유나 데우지 않아도 꿀떡꿀떡 잘 먹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야말로 여행에 최적화된 아기였다고나 할까.


물티슈, 담요, 수면조끼도 챙기고 조리원에서 홍보해서 살까 말까 고민했던 브랜드의 아기워시도 면세가로 조리원에서 제시했던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매했다. 그렇게 26인치 캐리어 두 개를 가득 채워갔다.

낑깡 5개월, 마카오 3박4일
여담인데, 둘째 키울 때는 애초부터 휴대용 젖병건조대를 사서 집에서도 쓰고 여행 갈 때도 가져갔다. 여행 중에는 액상분유와 전용 니플만 사용했다. 아기워시, 수면조끼, 빨대컵을 포함한 아기 식기, 장난감, 커다란 물티슈는 아예 들고 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세 번째 여행은 아기 9개월, 시부모님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이때에도 대충 26인치 캐리어 두 개를 챙겨갔던 것 같다. 겨울이라 옷 짐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얼 챙겨갔는지 생각은 잘 안 나고 아기가 교토의 좁은 음식점과 돈키호테의 빽빽한 환경을 너무 싫어해서 계속 짜증 냈던 것만 기억난다. 유모차에서 낮잠을 자본 적이 없는 아이라 여행이 더 힘들었다. 유모차에서 잠만 자 줬어도! 우리는 아직도 이 여행을 '불효여행'이라고 회자하고 있다.



그다음 14개월에 떠난 네 번째 여행은 분유를 뗀 기념여행과도 같았다. 우리 집은 돌잔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늦은 생일기념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원래 이름 붙이기 나름이다). 베트남 다낭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현지의 (한국에도 있는 그) 마트에서 햇반과 아기김, 우유를 구입했다. 빨대컵은 일찍 뗀 아이라 설거지 거리가 크게 없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런데 <경기도 다낭시>라는 명성답게 아침 조식에는 미역국과 야채죽이 나왔고 현지 쌀국수는 아기의 최애 음식이었다. 햇반과 아기김이 파고 들 틈이 아예 없었다. 결국 다낭 마트에서 장 본 것들을 고스란히 한국으로 다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게 웬 역수입이란 말이냐.

낑깡 14개월, 다낭 4박5일(사진에 보이는 거 다 없어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3살이 되던 해. 우리는 다시 평창을 찾았다. 트렁크와 조수석 가득 채웠던 백일 무렵의 아기짐들은, 기저귀 몇 장과 아이 여벌옷 하나로 끝났다. 다만, 2년 전 여행에서 <평창은 밤이 되면 엄청 춥다>는 걸 몸으로 직접 깨달았으므로 두꺼운 잠바를 각자 하나씩 챙겨갔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처음으로 "홀가분한 여행짐"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았던 것 같다. 여행 전후로 서두를 것도 없고 번잡하게 움직일 것도 없었다. 가방은 우리를 무겁게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계단이나 비탈길에서도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로지 여행지의 공기와 바람을 온전히 즐길 자유뿐이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가볍게 떠나는 여행을 동경했더랬다. 그런데 우리는 아기가 있으니 어쩔 수 없어. 아니었다. 하려면 할 수 있었을 터이다.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얼른 다음번 나의 미니멀 여행가방 실험을 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가 세상을 덮쳐버려 여행뿐 아니라 일상 전체가 멈추어버렸다.

낑깡 23개월, 평창 1박2일



그리고 세상이 조금씩 열리던 2022년, 우리는 새 가족 맞이를 앞두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어른 둘에 6살 아이 하나. 일주일치 옷과 물놀이 용품 전부를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담았다. 우리는 공항에서 짐을 기다리는 시간 없이 지체 없이 떠날 수 있었고, 숙소를 옮길 때도 번거롭지 않았다. 코인세탁소에 한 번 들러 옷을 전부 세탁했더니 다시 새로 여행을 시작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점점 가벼워지는 가방만큼 아이가 쑥 큰 것 같아서 뿌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낑깡 만5세, 제주도 6박7일



캐리어가 작으면 여행 출발과 마지막 순간에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여행에 좀 더 푹 빠져 지낼 수 있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회복 속도도 빠르다. 그렇게 아낀 에너지는 온전히 아이에게 쏟을 수 있다.


물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이것저것 챙겨가는 것은 좋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그것이 과해져 원래의 의도를 짓누를 때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이것을 생각하면 된다. 가방끈보다는 아이의 손을 잡자. 우리 여행의 목적은 '가족 행복'이지 여행가방 그 자체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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