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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슈하 Nov 08. 2024

미니멀 이유식 시작편

이유식 준비물 구입 대작전

아기가 태어나기 전, 우리는 아기와의 세상을 살기 위해 여러 물건들을 구입한다. 배냇저고리, 아기 침대, 작은 젖병 등등. 그리고 그중 약 반절 정도 되는 큰 부피의 물건들은 100일 즈음하여 사용을 다하고 비울 수 있게 된다. 물론 개인 차는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아기의 짐이 줄어드나 싶을 무렵, 우리는 다시 한번 대 쇼핑 시기를 맞는다. 바로 이유식을 시작하는 6개월 무렵이다.


누군가에게 이유식 준비물 구입은 제2의 혼수준비라고 한다. 하지만 요리에 소질이 없음을 알고 재빨리 내 입맛과 타협본 나로서는 이 칼과 도마의 시간이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는 무조건 소량으로만 집도한다. 우리의 10평짜리 신혼집에 햇빛이 안 들어서인지 바람이 안 들어서인지 간을 덜 해서인지. 아무리 겨울이라고 해도 두 번째 끓인 국에는 꼭 내가 원하지 않는 생명체가 탄생하곤 했다. 하얀 곰팡이가 피어오른 국을 개수대에 재차 쏟아부으며 '다음번엔 절대 한 끼 분량만 끓이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랬더니 된장찌개 끓이는 레시피가 감자 큰 거 반 개, 애호박 1/5개, 두부 1/3모, 양파 약간. 이런 식이다.


이유식은 정말 조금씩만 만든다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 끝에 먼저 아기를 키운 친구에게 SOS를 날렸다.


"친구야. 나 이유식 무섭다. 일단 뭐뭐부터 사야 해?"


"풀버전으로 알려줘, 아니면 간단 버전으로 알려줘?"


키야. 내가 제대로 연락했다. 이 친구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는데, 좋아하지 않은 분야는 놀랍도록 무심한 것이 나와 결이 꼭 같았다. 다만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좋아하는 것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이유식 제조도 비슷한 의미로 '좋아하는 것'의 영역에 다가가기 좀 어려웠다. 간단 버전을 요청했더니 명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있는 거 끓인 물로 소독해서 써. 그럼 돼."


만약 통화에 좋아요가 있었으면 수십 번은 눌렀을 것이다. 당시 인터넷에 <이유식 준비물>을 검색해 보면 대부분 이유식을 곧 시작할 사람들이 무엇 무엇을 샀는지 쇼핑 정보가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중 반절은 협찬물품 소개나 다름없었다. '이유식 끝나고 돌이켜보니 이것이 좋았고, 저것은 괜히 샀고, 그것은 대체품으로 무엇을 썼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류의 평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처럼 손바닥 한 뼘 만한 조리대에서 요리하는 사람도 없었고, 최소투자 최대효과를 뽑아내는 비법 같은 것 역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다들 널찍한 주방에서 세라믹 칼 세트와 도마세트를 자랑하고 있을 때, 우리 집과 비슷한 규모의 부엌에서 이유식을 해온 내 친구의 조언은 정말 황금과도 같았다.




일단 도마는 교체했다. 원래 쓰고 있던 도마는 플라스틱 재질이었는데, 열탕 소독이 어려웠거니와 이미 칼집 자국이 무성해서 마침 바꿀 때가 되긴 했었다. 자그마한 빨간색 실리콘 도마 구입 완료. (참고로 우리 집은 김치를 썰어먹거나 고기를 도마에서 써는 집이 아니다) 짝꿍이 되는 칼은 시부모님이 유럽여행 다녀오시면서 선물로 준 과도로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딸기만 갈아본 전적이 있는 핸드믹서 역시 초기 이유식 정예멤버로 발탁되었다. 물만두만 건져본 국자형 도 끓는 물에 담갔다 빼고 '넌 이제부터 초기 이유식 채망이다' 작위를 내렸다. 모든 이유식 책에 식재료가 g나 ml로 표기되어 있길래 전자저울과 눈금이 그려진 유리 보울, 그리고 눈금이 있는 이유식 보관용기를 구입했다. 스푼은 사은품으로 딸려왔다. 냄비도 코팅냄비밖에 없었기에 이 김에 스텐으로 된 제품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이유식 날. 쌀가루를 물에 개어 물에 파르르 끓여냈다. 소독한 이유식 용기에 정성스럽게 n분의 1씩 담아내고 식기를 기다려 입에 넣어주었는데...! 입술을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식이 반절 정도는 되었다. 그중 반절은 턱받이와 식탁에, 나머지 반절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각하지 못했던 그림에 상당히 난감했다. 평소에도 죽을 먹기 싫어하는 남편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특히 초기 이유식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방법도 있단다>를 알려주는 기간이라고 한다. 철분 보충은 그다음의 이야기다. 어쨌든 그렇게 아주 소-박 하게 이유식을 시작했다.


드디어 사람으로서 한 뻠 더 성장했구나.


둘째 육아 때는 미니멀이 더 업그레이드되어서, 눈금 그려진 이유식 용기는 아예 구입하지 않았다. 집에서도 쓰고 있는 500ml짜리 유리반찬통을 추가 구매해서 이유식을 보관했다. 50, 100, 150, 200ml 되는 지점에 스티커를 붙여서 스티커 붙은 통만 이유식 용기로 활용했다. 어차피 바닥으로 흘리는 게 반절이라 정확한 눈금이 큰 의미 없다. 이유식 기간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스티커를 떼고 반찬 및 냉동밥 용기로 사용하고 있다.
둘째 키울 땐 이유식 전용 용기는 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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