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날은... 뭔가 좀 이상했다. 바람은 잔잔하고 햇살은 유난스레 따사로웠다. 손끝은 따뜻한데 코끝은 시렸다. 어둠이 깔린 후에도 엉덩이는 따뜻하고 얼굴은 차가운 그 느낌 마치 한 겨울 온천 속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구름이 땅 밑에 깔려 괜히 둥둥 떠다니는 기분마저 들었다. 저녁도 다 먹었고, 아기도 다 씻겨놨고, 설거지도 끝내놔서 세상은 평화 그 자체였다. 그렇게 조용히 하루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 물론 난생처음 들어보는 굉음은 아니었다. 소방점검 때 들어보았던 딱 그 소리였다. 아파트 방송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 건물 전체가 웅웅 우는 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대피해 주십시오."
그럴 리 없었다. 오늘의 날씨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습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목소리에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일단 나가야겠다. 남편은 퇴근 전이었다.
당시 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바로 기저귀가방을 열어 사용한 물건을 전부 채워놓는 버릇이 있었다. 가방을 들고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기 낳기 전에는 가방을 아예 들고 다니지 않았으니 가방정리할 일 자체가 없었으므로 왜 그런 버릇이 생겼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이 날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사유야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으로썬 미리 가방을 챙겨놓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뽀뽀를 백만 개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가방만 있으면 아기와 외부에서 한나절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미리 정돈된 기저귀 가방 옆으로는 아기띠, 그 옆으로는 아기와 나의 겨울 외투가 걸려있었다. 비록 10평대의 작은 집이지만 단 한걸음의 낭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원터치로 외출 준비를 술술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고민한 것은 아직 날씨가 그렇게까지 많이 춥지 않았으므로 조금 얇은 점퍼를 입을지, 한겨울용 패딩을 입을지 선택하는 것이었다.
1초 만에 고른 나의 선택은 한겨울 패딩이었다. 밤이 되어 날씨가 추워졌을지도 모르고, 만약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앞으로의 계절을 위해 두꺼운 패딩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갈고닦은 미니멀라이프가 빛을 발하는 순간! 나에게 한겨울 패딩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옷을 고르는 시간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기띠를 하고 - 아기를 안고 - 가방을 메고 - 손에 핸드폰을 쥐고 튀어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 아마 10초도 넘기지 않았을 것 같다. 신축 주택이었기 덕분에 존재했던 현관 근처의 전기 및 가스 차단 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솔직히 이건 좀 멋있었다고 생각한다).
재빠르게 집 앞으로 나가니 지금까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앞집 가족도 신발을 신으며 현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 층에 4 가구가 살지만 우리 앞집 가족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초등학생 저학년으로 보이는 딸 둘이 있었다. 그 집 엄마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딸 중 한 명이 똘똘하게 대답한다. "엄마 불났을 땐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된다고 했어!" 언뜻 보이는 그 집 엄마의 눈빛은 '오작동이 틀림없는데'였지만 이런 아이의 이야기를 놓칠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 집 엄마는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계단실로 향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걸어 내려갔다. 등 뒤로 위층에서 사람들이 걸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주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같은 단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모두 필로티에 모여 웅성웅성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도 자욱한 연기도 없었으므로 진짜 화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듯했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리고,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마 오작동이긴 하겠으나 정말 화재가 맞다면 시댁으로 대피할 수 있음을 알렸다.
전화통화를 끝내고 났는데도 상황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아파트 관리사무실 직원분으로 보이시는 분이 모여있는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시는 게 보였다. 육안으로는 불난 곳을 찾을 수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정말 확실히 점검을 하려는 모양인지 단지 안으로 소방차도 한 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기띠에 안겨있던 아들내미의 눈이 조금 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소방차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방화복을 입은 소방대원분들이 건물로 뛰지는 않고 걸어가시는 모습 덕분에 조금 더 안심을 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자 사람들은 조금씩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안정이 되자 슬슬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밤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잠옷 차림인 사람도 꽤 있었다. 수면바지를 입은 사람도 있었고, 맨발에 슬리퍼인 사람도 있었다. 내복에 공주구두를 신은 앞집 아이의 모습은 조금 귀여워 보이긴 했다. 나는 공동현관문에 비친 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는 따로 잠옷을 챙겨 입는 사람이 아니어서 파자마나 수면바지차림은 아니었으나 목이 살짝 늘어난 맨투맨과 무릎이 좀 튀어나온 추리닝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흠 그래, 만약 이게 진짜 화재였으면 이 차림으로 지하철을 두 시간 타고 서울에 가야 한단 말이지.' 기저귀가방 챙겨놓았다고 자축할 때가 아니었다.
화재경보의 원인은 습한 날씨에 있었다. 연못에 사는 산신령도 무리 없이 걸어 다닐 것 같은 그날 역시 습한 날이었다. 여기에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응결이 발생하면 센서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오작동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나중에 복직해서도 사무실에서 이런 사이렌 오작동을 몇 번 겪었는데 1. 날씨가 습하고 2. 밤낮 온도변화가 심하고 3.(개인적인 경험으론) 지하일 경우 특히 오작동이 잘 발생하는 것 같다. 물론 실제 화재일 수 있으니 안일하게 반응하지 말고 꼭 대피를 할 것을 권한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홈웨어에 대한 기준이 조금 바뀌었다. 나는 우리 아기를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으로서, 만약의 상황에서는 아기를 제1순위로 챙겨야 하는 사람이다. 내가 <도저히 외부에서 입고 다닐 수 없을 지경>의 옷을 입고 집에 있다가 사이렌 소리를 듣고 '세상에 이 차림으로 나가야 한다고?'란 상황을 아예 내 인생에서 지워내기로 했다. 그다음 날 목이 심하게 늘어난 티셔츠와 보기 흉한 바지를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홈웨어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렸다. '적어도 헬스장이나 집 앞 슈퍼정도는 갈 수 있을 차림일 것.'
이후로 나는 홈웨어를 고를 때 오히려 더 깐깐하게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적어도 집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 옷을 입고 잠도 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는 '잠깐 등원할 때 입고 다녀와도 괜찮은 옷'이라는 단서도 붙이기도 했다.
저녁에 씻고 나서 새 홈웨어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그 옷으로 잠들었다가 일어난 뒤 바쁜 아침에 옷을 갈아입지 않고 그 옷 그대로 외출한다. 일을 보고 집으로 들어와서 씻은 뒤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 옷을 입고 잠든다. 이런 식의 루틴에 걸맞은 옷을 구입하는 것이 솔직히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기준으로 옷을 고르게 되니 '집에서 입는 옷'과 '가벼운 외출 활동을 할 때의 옷'의 경계가 없어져서 옷장을 조금 더 단출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는 되었다.
이 날의 일은 다행스럽게 이렇게 해프닝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미니멀라이프 옷장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인생의 사건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가끔 이 날의 일을 아들에게 하는데, 아들은 그때 봤던 소방차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