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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슈하 Nov 29. 2024

미니멀 돌잔치

결혼기념사진, 만삭 사진, 50일 사진, 100일 사진 촬영을 따로 사진관에서 찍지 않은 우리 부부도 '이것만큼은 꼭 해야겠다'는 것이 있었다.


바로 돌 사진 말이다.


상견례에서 결혼까지 걸린 기간은 딱 2달. 딱히 스몰웨딩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나 촉박했던 터라 나의 결혼식은 더 더할 것이 없는지 살피는 과정이 아닌, 더 뺄 것은 없는지 고민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시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뺄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생략하였고(외동아들 결혼시키는데 전부 생략해도 좋다고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결혼식 스튜디오 촬영과 폐백 역시 결혼과정에서 과감히 덜어내었다.


따라서 나는 결혼 3년 차가 되도록 아직 한복을 입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결혼식 전, 사진작가님께 친정어머니의 부재를 따로 설명하지 않았더니 모든 가족사진에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여 귀한 발걸음 해주신 작은어머니의 사진이 가족사진에 전부 들어가게 되어 딱 우리 가족만 찍은 사진도 없는 상황도 있었다.


따라서 나는 온 가족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기를 희망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를 제외한 양가 어른 총 3명을 아이의 돌사진 촬영에 초대했다.



마침 동네에 시에서 새로 조성한 한옥마을이 있었는데, 한옥 찻집이나 전통놀이 체험장, 그리고 한복무료대여와 사진촬영을 해 주는 곳도 있었다.


이곳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액자나 앨범은 별도로 해주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액자와 앨범이 없는 것이야 말로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사랑, 헌신 이런 뻔한 답변 말고 조금 재치 있고 유우머가 가미된 답변으로 뭐 좋은 것이 있을까. 이 질문을 고민하던 찰나에 어떤 미니멀리스트의 영상을 보았다. 그 부부의 답변은 <가성비>였다. 최선을 다하는 삶도 좋고 끝까지 이악물며 노력하는 삶도 물론 좋다.


하지만 초반에 전력을 다하면 완주가 어려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칠지도 모른다. 어떤 악몽이 실제로 나타나게 될지 장담할 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작은 삶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 돈은 적게 쓸수록 좋고, 기쁨은 크게 누릴수록 좋다. 이 스튜디오가 딱 그러했다!


돌잡이 사진, 아이와 부부와 찍는 가족사진, 양가 부모님까지 함께 한 가족사진을 전부 찍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의 생일 날짜에 맞춰서 사진을 촬영했다면 한복이 덥다며 아이의 투정이 상당했을 거라며, 봄날씨 만연한 그날 사진을 찍는 게 너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아이의 돌사진은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기 전인 10개월 반에서 11개월 즈음 사이에 촬영을 한다고 한다. 나는 이걸 둘째 돌사진 촬영 예약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남편은 첫째 아기 돌 전후로 장기 해외출장 중이었고 휴가 받아서 들어오는 4일 중 하루를 골라 급하게 여길 예약한 것이었는데, 그 시기가 아이 딱 11개월 무렵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돌 전 아기가 있는 집에 장기출장을 보내다니 이런 건 법으로라도 막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긴, 둘째 아이 때는 출산예정일 바로 전 주에 해외출장명령이 떨어진 적이 있었고(동행자 코로나감염으로 출장이 무산되었었는데, 그 출장기간 중에 응급출산을 하게 되었다. 그대로 출장을 갔었더라면... 끔찍하다.) 출산 후 100일이 되기 전에도 해외출장을 다녀왔더랬다.

나는 친정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 둘을 봐야 했고... 여기까지만 하겠다.


그렇게 돌촬영을 마친 우리는 시어머니와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만두전골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게 아기 돌잔치의 피로연인 셈이다. 가족행사도 너무 크게 챙기지 않고 소소하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뜻을 부모님들께서 이해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했다.


우리는 졸아드는 국물에서 채소 건더기와 만두를 떠먹으며 호텔 뷔페 못지않은 성대한 식사를 했다. 떠들썩한 음악도 반짝거리는 선물 포장지도 색색의 꽃들도 없는 아주 조촐하고 맛있는 피로연이었다.






그리고 아이 진짜 생일을 일주일 조금 안되게 앞둔 어느 날. 아이와 유난히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났던 그날.


꿈에 친정엄마가 나왔다.



그곳은 엄마와 아빠가 생애 마련한 첫 자가였고, 내 인생의 절반인 20년의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며,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살고 있던 김포의 한 낡은 아파트였다. 둘러보니, 그 집 작은 부엌이 아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커다란 상에 음식을 연신 나르고 있었다.  이 집에 이사와 친척들 모두 불러 집들이 한 이후로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집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맞은편엔 나 대학생시절에 돌아가셨던 친할머니도 계셨는데, 굽은 허리 위로 우리 아들을 업어주며 웃고 계셨다. 그야말로 <잔치>였다.


이윽고 밥상이 다 차려졌고 무엇부터 먹을지 고민하다가 밥을 한 술 딱 떴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것이 꿈인 것을 깨닫고 말았다. 바로 앞에 떠 놓은 미역국이 뿌옇게 흐려졌다. 엄마한테 너무 고맙다고, 우리 아이 잘 크지 않았냐고, 안아주고 싶었는데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목에서 아무 소리가 나오지 않아 가슴을 움켜쥐었는데, 숨 쉬기 어려울 정도의 슬픔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때 눈이 딱 떠졌다. 나는 삶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다시 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아... 우리 엄마가 내 첫아이 첫 생일상을 차리러 와주셨구나.






비록 나(와 남편)의 의지로 아이의 돌잔치는 사진촬영과 만두전골로 들인 돈에 비해 대만족을 하며 성황리에 잘 마쳤지만, 사진도 너무 예쁘게 잘 나왔으면서 부피를 차지하는 액자와 앨범이 없어서 (미니멀리스트로서) 더더욱 만족을 했더랬지만.


그래도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돌잔치를 보면서 '나도 이렇게 할 걸 그랬나' 불쑥 아쉬워지는 순간도 분명 있기는 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보여주는 것'보다는 우리 가족끼리 회상하고 웃을 수 있는 것에 가성비 있게 더 집중하기로 했으니.



첫 생일상으로 만두전골을 받은 그 아이는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어 어린이집에도 잘 가고, 유치원도 잘 가고, 학교에도 잘 들어갔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을 속상하다 여기는 날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날의 꿈을 떠올리면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하긴,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만큼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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