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신축이라서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관리사무실이 있었다. 가장 좋은 건 깔끔한 붙박이장이 방마다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옷장과 수납장은 따로 구매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찌 보면 "코딱지만 한" 붙박이장이었지만 차라리 옷가지와 살림살이를 붙박이장 사이즈에 맞추어 규모를 줄여 나갔다. 덕분에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도 수납가구를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한 계절에 입히는 아기 옷이 5여 벌뿐인데 이것 두겠다고 아기 옷장을 사는 건 상당히 낭비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아기옷을 물려받을 데가 없다는 것이 미니멀리스트로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기가 스스로 잡고 일어나고, 걷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항간에서 말하는 베이비룸이니 서랍잠금장치니 하는 것 말고 말이다. 우리 집 거실엔 도저히 베이비룸을 둘 공간이 없었다. 안 그래도 공간이 아기자기한데 여기를 가두어두는 것 자체가 아기에게 미안할 일이었다. 현관, 욕실, 컴퓨터가 있는 남편 서재(방이 2개인 집인데 그 와중에 하나는 서재였다)에만 안전문을 설치해 두었다.
회상해서 보니 이것도 별로 필요 없는 일이었다. 무조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아기 성향상 그랬다.
양가 첫 손주이자 엄마아빠가 전부 외동이니 유일한 손주, 그리고 구시대적인 수식어까지 끌어와서 설명하자면 3대 독자인 아이는 원하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장난감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이 조금 느렸다. 어린이집을 다니지도 않았고, 집에 티브이는 없었고, 아빠의 퇴근은 항상 늦었으니 소통창구는 엄마인 나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혼자서 조잘조잘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빨랐으면 "자동차 사주세요" "트럭 사주세요" 조잘조잘 떠들었을 텐데, 미니멀리스트 엄마가 한 발 더 빨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기껏 치운 집이 어지러워져도 아이에게 뾰족한 말을 할 수 없도록 아이 손 닿는 곳에서 위험한 물건들을 전부 치우는 것이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아이에게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라고 했다. "안 돼"라는 말을 최대한 하지 않기 위해 MBTI의 두 번째 문자가 대문자 N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면밀히 살펴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소재들은 전부 상부장에 봉인하였다.
식칼, 가위는 물론 간장, 밀가루, 기름도 아이 손이 닿는 곳에는 보관하지 않았다. 전기콘센트엔 전부 마개를 설치해 두었다. 소파나 티비장도 없었으니 기어올라가거나 부딪칠만한 가구는 식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식탁 다리에 두툼한 쿠션가드를 붙이기만 하면 안전장치는 모두 끝.
그 외에는 전부 아이가 만져도 오케이.
덕분에 아이는 주방놀이 장난감 대신 주방을 갖고 놀았다. 의자를 끌고 와 서랍을 열어 실리콘 뒤집개를 꺼내 하부장의 냄비를 꺼내서 노는 식이었다. 하부장 맞은편의 서랍에서 참치캔을 꺼내 냄비에 흔들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이 모든게 장난감(겸 비상식량)
모든 놀이의 끝은 엄마를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머 오늘 점심은 네가 요리사구나! 잘 먹을게, 냠냠!"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나, 출장을 다녀온 아빠가 장난감을 하나씩 사주기도 했다. 문화센터에서도 매달 장난감을 나누어주었다. 이런 자잘한 장난감들의 위치는 부엌하부장의 맨 마지막 서랍장이었다.
장난감보관함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장난감 전체의 부피가 이 서랍사이즈를 넘으면 정리정돈이 곤란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아이를 관찰하고 또 관찰하여 아이의 관심이 시들해진 장난감이 생기면 바로 집밖으로 비워냈다. 타고 노는 붕붕카나 미끄럼틀 같은 큰 장난감은 집에 아예 들여놓지를 않았다. 아니, 못했다. 거실이 너무 작았으니까!
그래도 이런 건 가능했다. 매트 미끄럼틀!
대신에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아냈다. 눈이나 비가 휘몰아치는 날씨가 아닌 이상 아이와 함께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내가 살았던 단지는 놀이터라고 불릴만한 공간도 없었으므로 항상 단지 밖을 돌아다니곤 했다. 어느 날은 옆단지 놀이터, 또 다른 날은 공원에서 뛰어놀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 키즈카페를 검색해서 들어갔는데 세상에. 10회권을 파는데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장난감 두세 개 사는 가격보다도 저렴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주에 2~3회, 키즈카페에 등원하기 시작했다.
아침 10시에서 11시 사이, 아이와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기상한다.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서로 나누어 먹는다.
설거지를 끝내고 집 정리를 대충 끝낸 뒤, 잠바를 챙겨 입는다.
20분 정도 걸어 키즈카페에 도착.
생명수 주문. 키즈카페에서는 아이스 음료를 마셔도 춥지가 않다.
2시간 동안 신나게 논다. 다른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손님이 없는 김에 나도 에어바운서나 미끄럼틀을 타본다. 서른 넘어서 타는 미끄럼틀 이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몸으로 놀기가 한차례 끝나고 나면 아이는 자동차 장난감을 찾아 자리에 앉는다.
정말 꼼짝도 안 하고 잘 앉아도 있는다. 너 고3 때도 꼭 이래야 한다?
옆에서 나는 나대로 피아노장난감을 치거나, 맥포머스를 갖고 논다.
시간이 다 되면 친해진 키즈카페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유모차에 탄 아이에게 우유를 한 팩 쥐어준다.
옆 건물에 있는 쇼핑몰에 걸어가는 사이, 아이는 유모차에서 잠이 든다.
유모차 커버를 내리고 눈으로 쇼핑을 한다.
유모차가 멈추는 순간 아이가 깨기 쉬우므로, 춤추는 빨간 구두처럼 계속 돌아다닌다.
진짜 진짜 힘들 때만 멈추어서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저녁과 다음날 아점으로 먹을 장거리를 봐서 집에 도착.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아기 낮잠 기상.
샤워를 하고 작은 대야에 물을 받아둔다.
아이가 물놀이하는 동안 저녁밥 준비.
저녁식사 후 바로 설거지.
아이는 엄마가 부엌에서 떨어지도록 최대한 노력.
책을 읽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아빠 도착.
아빠랑 놀다가 인사하고 밤 11시쯤 엄마와 함께 취침.
아침 10시에서 11시 사이 기상.
매일매일이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키즈카페를 가지 않는 날에는 마트 문화센터나 공원으로 돌아다녔다. 집에서 30여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는 게 조금 단점 이긴 했다.
집에 커다란 장난감도, 자잘한 장난감을 많이 두지 않고도 아이는 매일매일 갖고 놀 것이 생겼다. 그러니까 약간의 돈을 내고 장난감을 집 밖에 보관해 놨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큼직한 정리만 하면, 자잘하고 세심한 정리는 내가 하지 않아도 되니 어지른다고 제자리에 두지 않았다고 아이나 내 자신에게 화낼 일이 없으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 둘째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 코로나 팬데믹 시국을 거치며 키즈카페의 모습도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무인 대여로 진행되어 친구들을 만날 수 없거나, 아니면 입장료가 굉장히 비싸졌다. 그래서 "작은 집에 살아도 괜찮아요. 장난감 많이 없어도 괜찮습니다."라고 나만의 육아 노하우를 알리기가 좀 민망해졌다.
미니멀 육아 비법 중 놀이터에 가면 된다, 도서관에 가면 된다, 공원이나 산으로 가면 된다고는 하지만, 나도 놀이터가 없고 공원이 집에서 먼 곳에서 살아봐서 안다.
어떤 집들은 내가 살았던 그 집처럼 놀이터, 도서관, 공원이 너무 멀다. 집 밖은 전부 차도뿐인 데다가 심지어 차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은 집에 장난감을 쌓아두면 엄마가 너무 답답해질 수 있다. 혹시 장난감 치우다가 지쳐 아이에게 무심코 버럭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는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금 멀더라도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그때를 대비해서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엄마와 아기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보물 같은 장소 한 군데는 꼭 알아놔야 한다. 아이들이 돌아다녀도 괜찮다고 하는 카페도 좋고, 마트도 괜찮다. 도서관이나 공원처럼 돈이 들지 않은 곳이면 더더욱 좋겠지만, 아무튼 그 공간에서는 엄마도 즐거워야 한다.
그러니까 엄마인 나는 아기 말고도 '나'의 기분도 돌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집에 쌓아둔 장난감만으로는 엄마의 기분까지 돌보기는 힘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