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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올인원

애착인지 집착인지

by 파슈하

기묘하다.

2025년의 여름을 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번 여름에는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더운 것이 여름의 미덕이라지만 해도 너무했다. 반팔과 반바지를 사랑하는, 여름의 절정에 생일이 있는 나조차도 올여름은 정말 힘들었다.

잠시도 땀을 흘리지 않을 때가 없는 딸아이 핑계를 대고 아주 약하게 24시간 에어컨을 돌려댔다. 쉬지 않고 일한 것은 에어컨인데 내 몸이 먼저 고장이 나 버렸다. 여름 감기에 들어버린 것이다.


국가공인 여름철 실내온도는 26도이건만 28~29도로 트는 에어컨에 골골되니 참으로 억울했다. 으슬으슬한 느낌에 에어컨을 끄면 바로 발바닥이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어쩔 수 없이 온도를 슬쩍 올렸더니 이번에는 아이들 이마에서 불만이 쏟아진다. 어쩔 수 없이 에어컨 온도를 다시 28도로 내렸다. 대신 긴바지를 조금 빨리 꺼내 입기로 했다.


다년간의 미니멀라이프를 꾸준히 실천한 덕분에 옷장에는 4계절 모든 옷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따라서 긴 바지를 꺼낸다고 깊은 옷장을 뒤진다거나 리빙박스를 열어야 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가진 긴바지는 현재 총 4장, 그중 두 벌은 겨울을 위한 것이니 내 선택지는 남은 두 벌 중 하나. 그중 굉장히 애착이 가는 바지가 있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몇몇 미니멀리스트의 에세이를 보다 보면 캡슐옷장에 대한 재미있는 힌트들을 많이 캐낼 수가 있다. 그중 하나는 몸에 잘 맞는 바지를 하나 선정해 놓은 다음 계속 그 바지만 입는 것인데, 만약 입고 있던 바지를 교체해야 할 때가 되면 주저 없이 같은 브랜드의 같은 사이즈로 구매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지를 사야 할 때 사이즈나 핏을 고민하는 수고로움은 자연스럽게 '비우게' 된다.


나도 비슷하게 한 때 유니클로의 레깅스팬츠를 즐겨 입었던 적이 있었다. 많이도 필요 없다, 사계절동안 딱 2벌. 검은색 하나, 청색 하나. 바지를 잘 세팅해 놓으니 바쁜 아침에 '이 상의와 이 하의가 어울리는가' 따위의 고찰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똑같은 핏의 바지 두 개뿐이니 상의나 아우터도 그에 맞춰서 구입하면 되는 것이다.

바지에 구멍이 날 때까지 입다가, 진짜 구멍이 나면 똑같은 바지를 구입했다. 당장 사지 않으면 입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세일기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덤이었다. 구입하자마자 세일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사소한 부작용정도로 생각하면 될 일.


그렇게 잘 입던 유니클로의 레깅스팬츠를 비우게 된 건 큰 계기도 아니었다. 그 바지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게 되자, 핸드폰과 작은 잡동사니를 넣을 자리가 꼭 필요했다. 나이를 먹다 보니 다리를 감싸는 느낌도 싫어져서 레깅스팬츠는 이제 더 이상 입게 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핏과 촉감, 주머니를 다 잡은 바지가 이렇게 귀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나는 바지 유목민의 생활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지는 다른 아이템처럼 '전천후'로 쓰였으면 했다. 그러니까, 이걸 입고 마트도 가야 하고 여행도 가야 하고 (이 부분을 이해 못 하시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결혼식도 참석할 수 있는 동시에 잠옷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바지가 세상에 존재할까? 싶었던 2022년의 어느 날, 이 말도 안 되는 내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는 바지를 구입해버리고 만다.


운명이었다.



이 바지에 대해 묘사를 해 보자면, 일단 고무줄 허리에 레이온과 스판이 꽤 높은 비중으로 혼합된 천을 사용하여 촉감이 부드러운 것이 잠옷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았다.


꽤나 넓지만 다리를 두껍게 보이지 않는 다리통은 여행지에서 사진 찍을 때도 꽤 유용했다.


허리를 잡아주는 밴딩 부분은 꽤나 세련되게 빠져서 셔츠를 넣어 입어도 오케이, 그 아래로 핀턱이 고급스럽게 잡혀 있어서 멀찍이서 본다면 꼭 슬랙스의 모양이었다.

제법 차려입어야 할 자리에 입고 가도 손색이 없는 디자인이었다.



다른 바지가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 바지에 손이 갔으므로, 다음 해에 낡고 불편한 다른 바지들을 전부 처분하고 똑같은 바지를 한 벌을 더 마련했다. 인터넷 보세샵인데도 불구하고 1년 넘게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인기제품이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바지를 다 닳을 때까지 입다가 새 바지가 필요하면 다시 구입하면 되겠거니.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아뿔싸.


거기서 1년이 더 지난, 그러니까 작년에 이 바지를 추가구입하려고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보이는 글자는 야속하게도 <품절>이었다.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두 벌 중 한벌은 너무 자주 입고 세탁을 했던 나머지, 무릎에 구멍이 뚫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이거 나만 좋았어요? 나만 진심이었던 거야?


일방적인 실연의 아픔을 겪고 나니 이제 다시는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온갖 SPA브랜드들을 다 뒤져봤는데. 아. 이런 바지, 또 없다.

모르고 살았으면 모르겠는데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니 쉽게 마음이 놓아지지가 않았다.



옷장 미니멀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한다. 옷장에 내가 좋아하는 옷만 있다면, 얼마니 기분이 좋겠냐고 말이다.

일 년 사계절 옷 20벌까지 줄여봤던 평범한 주부 미니멀리스트인 나의 감상평을 말해보자면, 20벌 중에서도 손이 안 가는 옷은 분명 존재한다. 8:2의 법칙이 여기서도 통하는지.


그런데 정말 좋은 옷은 매일매일 잘 입지만, 닳아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마음 또한 애달파진다. 이 옷을 정말 못 입을 때가 되어 교체를 해야 할 때가 온다면, 이것만큼 찰떡인 옷을 내가 또 구할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사랑을 낡음이라는 또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옷을 붙잡고 이것이 애착인지 집착인지 고민하고 마는 것이다.


법정스님께서 소유를 하지 않는 것이 집착을 놓은 방법이라 알려주셨거늘. 그렇다고 내 인생에서 바지 자체를 소유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냥 그런 바지 여러 벌 가지고 있던 미니멀라이프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옷장을 그냥저냥 한 옷으로 채워두는 것도 별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옷장에도 정답이 없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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