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블록만 한 것이 없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전의 내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단어카드를 하나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키덜트"를 꼽을 것이다.
또래의 아이들이 장난감에서 벗어나 아이돌, 연예인 같은 세계로 넘어갈 때에도 나는 끝까지 알록달록한 세계에 남아있었다. 드라마보다는 만화가 편했고, 연예인보다는 캐릭터가 좋았다. 포토카드보다는 역시 귀여운 스티커지. (참고로 예전에는 포토'카드'가 아니라 '포토' 그 자체를 팔았더랬다)
내가 이렇게 영원한 동심에 세계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내가 본격 미니멀리스트가 된 계기를 꼽자면, 10평대 투룸에서의 육아가 시발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부부 두 사람의 짐을 두기에도 적당한지 부족한지 모를 그 공간에 인간 하나가 더 들어왔으니. 몸집은 비록 작을지언정 세간살이는 어른 못지않았다.
예를 들면 어른은 팬티 5장만 있어도 일주일을 나지만 아기의 경우엔 기저귀가 필요한데, 이 기저귀라는 물건은 보통 '박스' 단위로 구매해야 한다. 어른은 밥공기 하나 국공기 하나 수저 한 세트면 밥을 먹지만 아기는 젖병과 세척솔, 경우에 따라서는 소독기,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면 작은 숟가락과 식판도 필요하다. 전용 의자는 말할 것도 없다.
집이 작다는 핑계로 수많은 육아템들ㅡ역류방지쿠션, 기저귀갈이대, 트롤리, 아기침대, 아기병풍, 점퍼루, 울타리 등등 집에 들이지 않았는데도 집은 금방 꽉 차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아주 자연스럽게, '장난감 보관용 서랍' 역시 구매리스트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둥지가 없으니 장난감도 아주 최소한으로 구매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이렇게도 놀 수 있고, 저렇게도 놀 수 있는 다용도였으면 좋겠다. 이건 내 전문분야지! 이런 상황에 딱 맞는 장난감이 몇 개 있다. 그중에서 가장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역시... 블록이었다.
내가 4살인가 5살이었던 무렵인가, 설날 선물로 큰어머니께 블록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핑크색 플라스틱 가방 안에 한가득 들은 것은 내 인생 첫 블록이었다. 처음엔 그것만으로도 참 재미있게 갖고 놀았는데, 몸이 크고 사고가 커져버리니 블록의 수가 부족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마당을 가진 2층짜리 대 저택인데 벽돌이 부족하니 만들 수가 없었다. 추가로 블록을 누가 더 선물해 주면 참 좋으련만.
조금 더 작은 블록으로는 더 섬세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처음 알았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되지 않았던 외동아이를 키우는 우리 집에서의 장난감이란, 그냥 한 때 잠깐 스치고 지나갈 물건이었을 뿐이라 생각하신 부모님은 '나도 작은 블록이 갖고 싶다'는 소리를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들으셨던 것 같다. 초등학생 때부터의 내 생일선물은 항상 책, 아니면 학용품 정도였으니.
장난감 결핍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은 성인이 되어서도 주기적으로 장난감가게를 방문할 명분을 주었다. 나의 남편도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런가, 우리는 종종 토이저러스의 레고 코너 앞에서 "거실장엔 이 블록을 두고, 서재에는 저 블록을 두고." 식의 데이트를 했더랬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기가 생긴다면 그 아기는 블록수저를 잡고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신혼집 사이즈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육아를 하는 동지들이라면, 레고 1×1사이즈 블록과 아기 콧구멍의 상관관계는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기의 첫 블록은 레고처럼 작은 사이즈가 아닌 큼지막한 것으로 시작했다.
굳이 상표명을 쓰자면 레고에는 듀플로 시리즈가 있고 옥스포드 블록도 있다. 듀플로는 꽤 비싼 편이었어서 옥스포드 블록이 우리 아이의 첫 블록이 되었다.
2층 대저택의 한이 아직까지 남아있었으므로 개수는 많은 것으로, 또 아이의 취향을 고려해서 기차를 만들을 수 있는 제품으로 골랐다. 그 해 크리스마스 선물 역시 사이즈 호환이 되는 시리즈의 블록제품으로 마련해 주었다.
바퀴 달린 블록은 기차가 되었다가, 자동차도 되었다가, 버스가 되었다. 네모 판판한 블록은 기차역이 되었다가, 2층집이 되었다가, 유치원도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선물 받은 '작은 사이즈 블록', 즉 레고의 즐거움을 아이가 알게 되었고, 이후의 선물 리스트는 <레고> 시리즈들로 빽빽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린이날에도 레고, 생일에도 레고, 크리스마스에도 레고. 어렸을 적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을까? 아이가 다른 장난감도 아닌 '레고'를 갖고 싶다면 그것이 그렇게 기특해 보였다.
하지만 요즘의 레고는 나의 상상을 표현할 수 있는 3D 스케치북이 아닌, 일회용 퍼즐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는 걸 본격적으로 레고생활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깨닫게 되었다. 아이는 설명서 외로 조립하는 법이 없었고, 한 번 조립하고 나면 몇 번 갖고 놀다가 그대로 방치되어버리곤 했다.
다시 장난감이 없어져서 심심해진 아이의 손에는 어쩐지 다시 옥스포드 블록이 들려있었다. 그러고선 제 혼자서 무언가를 뚝딱 뚝딱 만들어댔다. 어느 날은 로봇을 만들었는데, 동일한 블록을 재조립하면 비행기로도 변했다. 블록으로 아이 스스로 만든 변신로봇이라니! 수많은 레고들이 있지만 결국 아이의 상상력을 조립해 주는 건, 그 커다란 옥스포드 블록뿐이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첫째는 공식적으로 블록의 소유권이 동생에게 위임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렇게 옥스포드 블록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 한 켠에 잘 자리 잡고 있다.
주방놀이 장난감을 사는 대신 블록을 조립해서 싱크대를 만들어주니 아이는 손을 닦는 흉내를 내었다.
어느 날은 바닥에 누워있는 내게 동그란 블록을 가져오더니 청진기처럼 가슴에 대는 흉내를 내었다. 아이의 상상력에 감탄하며 기침소리를 내었더니 이번에는 기다란 막대블록을 가져와서 "아~ 하떼요." 하고 말한다. "의사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니 블록 반창고를 붙여주겠단다. 한 달도 채 갖고 놀지 못한 채 망가져서 버린 다○소표 병원놀이가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번엔 제 손바닥만한 블록을 가져오더니 나를 부른다. "여기 보세요, 찰칵!"
내 아이에게서 올인원 러버의 면모가 보이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찰칵 소리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