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육아 필수품
회사 초년생 시절, 사무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셨던(그래봤자 50대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 선배가 "왜 여자들은 가방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아마도 가방문제로 집에서 아내분과 다투신 것 같았다.
그러자 나보다 대여섯 살이 많지만 회사 경력은 꽤 길었던 선배 언니가 대답하길, "선사시대에 사냥을 하던 사람들은 빠른 이동수단을 원하고, 채집하던 사람들은 무얼 담아둘 공간이 필요해서 그렇대요." 물론 농담이었겠지마는, 그 말을 들은 남자 선배는 '아하'라는 표정이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했더니 그중 한 명이 "그럼 나는 전생에 사냥을 했었나 봐."라고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자마자 차부터 샀기 때문이다. (집과 버스정류장이 아주 멀다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묘하게 성차별적인 농담으로 느껴지는 이 문구는 제법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떠돌아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가방이 걸리적거리게 느껴져서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았는데 휴대 필수품인 핸드폰을 휴대할 곳은 필요했기에. 주머니 있는 옷을 찾아다녔었는데 이상하게도 여성용 옷에 주머니가 달려있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바지도, 스커트도, 원피스도, 재킷도. 여성용 디자인이라고 하면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그래도 요즘엔 주머니 있는 옷이 많이 나오는 편이라지만 10년 전만 해도 정말 드물었다.
마음에 드는 원피스에 주머니를 달기 위해 동네 수선집을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딱 한 군데만 제외하고는 "가방을 들고 다니면 되지 왜 굳이 주머니를 달아요?"라는 질문까지 받았다.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하자 "왜요?"라고 대답하는 그분들에 표정에서는 뭐랄까. 채집자들의 강력한 DNA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지금도 옷을 사려고 한다면 상품 상세페이지에서 주머니가 있는지 없는지를 아주 상세히 봐야 한다. 핏과 재질만 보고 구매했다가 주머니가 없는 경우가 아직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녀공용으로 나오는 등산 브랜드의 점퍼에는 주머니는 물론이요, 지퍼까지 덧대어진 넉넉한 안주머니까지 있어서 깜짝 놀랐었다.
오른쪽 주머니엔 핸드폰, 왼쪽 주머니엔 차키. 지금은 차가 없으니 차키 대신에 아이들 입을 닦아줄 물티슈를 넣어놓지만 말이다.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음으로 인한 양손과 어깨의 자유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방을 찾아들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니. 바로 아이들이 어릴 때 말이다. 내 한 몸 외출하려면 핸드폰만 들고나가면 땡이었지만 아기는 그렇지 않다.
연령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돌 전 아기를 기준으로 기저귀는 최소 2장 이상, 물티슈는 넉넉하게, 턱받이, 아기 간식, 액상분유, 이유식 파우치. 아이가 액상분유도 잘 먹고 시판 파우치 이유식도 잘 먹는 편이라 '간단 버전'으로 챙긴 건데도 이렇다. 보통은 여기에 여벌옷, 장난감, 물통, 텀블러, 수저, 손수건, 담요, 공갈젖꼭지도 넣는다.
아무튼 짐이 이러하다 보니 가방을 챙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보통은 아기의 탄생과 함께 '기저귀 가방'이라는 것을 만들게 된다. 사실 기저귀 가방이라고 해야 대단한 건 없고, 최대한 간결하고 가벼운 가방에 기저귀를 넣으면 완성이 된다.
한 번에 많은 물건들을 수납해야 하기 때문에 내부가 잘 구획되어 있으면 조금 더 편하게 쓸 수 있다. 가방 안에 따로 주머니나 수납공간이 나누어져있지 않더라도 이럴 땐 이너백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아니면 적당한 큰 파우치에다가 기저귀와 자잘한 것들을 넣어놓아도 괜찮다.
둘째가 태어나고 나서 기저귀가방으로 선택된 것은 스타벅스 15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판매된 에코백으로, 연애시절 남편이 선물로 해 준 것이었다. 당시 남자 친구에게 받았던 것을 기저귀 가방으로까지 쓰게 되다니 감회가 참 남달랐던 기억이 있다.
에코백은 131번을 들어야 환경보호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에코백은 이미 나와 함께 100번이 넘는 외출을 했었고, 한동안 잠들어있다가 아기의 첫 외출과 함께 다시 빛을 보고, 이후로 약 일 년 동안 함께 했다. 아이가 분유와 이유식을 떼게 되었을 때 즈음해서는 너무 낡아버렸기 때문에 시원섭섭한 마음을 담아 헌 옷수거함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가방에서 벗어나게 되었냐면, 노.
아직 둘째의 기저귀를 떼기 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여행 갈 때나 길게 외출할 때 가볍게 들만한 가방이 필요해졌다. 무엇보다도 휴대용 힙시트를 넣어 다닐만한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침 여행지에서 괜찮아 보이는 네이비색 더플백이 보여서 바로 구입하였다.
크로스백으로 멜 수 있는 이 가방은 특히 여행지에서 빛을 발하였는데 아이들의 얇은 바람막이나 먹다 남은 과자 같은 것을 넣어두기에 딱이었다.
무엇보다도 급하게 아기를 안을 일이 있을 때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대용 힙시트를 꺼내는 것보다 아기를 안고 크로스백 자체로 아기 엉덩이를 살짝 받쳐만 주어도 괜찮은 걸 발견했다.
세상에! 가방의 역할이 가방으로 끝나지 않을 수가 있다니.
이렇게 가방을 또 슬쩍, 나만의 올인원 리스트에 올려본다.